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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너네 연애하냐!

뭐야 뭐야

by 시트러스

1. 겨울의 예감

오후부터 꾸물꾸물한 것이 하늘이 심상치가 않다.

갑작스레 추워진 공기 탓에, 정말 예보대로 첫눈이 올 것만 같았다.

나는 왠지 싱숭생숭, 긴장감 속에 중3 교실 앞을 지나 교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첫눈이라면 아이들 마음도 들쑤셔지기 마련이다.

하늘만큼이나 떠 있는 교실 분위기를 미리 가늠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눈이 오면 흥분한 중학생들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지난여름 폭우가 쏟아진 날,

감옥 문이 열린 듯 우르르 쏟아져 나와 축구를 했었다.


6교시 수업이 끝나서 아이들이 복도로 나왔다.

윽, 진영이다.

"선생님!!" 아직 9반 끝인데,

7반에서부터 날 보고 슬라이딩해서 오려는 폼이 여간 미친 게 아니다.

"하지 마라."


2. 복도는 슬라이딩이 제 맛

그대로 미끄러져 온 진영이는 옆으로 길게 누워 옆머리를 손으로 받쳤다.

침대에 누운 듯, 편안해 보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우리 진영이, 조금만 평범하게 인사해 줄 수 있어?"


"아아악!" 진영이가 갑자기 복도에 모로 누워 생선처럼 앞뒤로 파닥거렸다.

"선생님! 미모가 너무 눈부십니다."

... 그냥 한 대 때릴까....


고민하는 사이, 아이들은 일상이라는 듯, 누워있는 진영이를 넘어갔다.

생긴 건 멀쩡한 애가 왜 저러는지. 심지어 저 녀석은 전교 부회장이다.

하지만 나는 진영이가 한방에 벌떡 일어나게 할 방법을 알고 있다.


3. 아씨오, 효주!

옆반에서 나오는 여학생을 불렀다. "효주야! 안녕."

"선생님, 노트북 들어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정상 학생으로 돌아온 진영이가 과묵한 목소리로 내 노트북을 뺏어 들었다.


효주는 3학년 남학생 사이에서 아이돌급 인기 여학생이었다.

"효주가요?" 처음에 들었을 때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예쁘고, 성실한 아이였다. 그건 알겠는데, 아이돌급?


그러다가 효주가 댄스 동아리 센터로 섰던 작년 축제 영상을 보게 되었다. 긴 머리를 흩날리며 늘씬한 팔다리로 격렬한 춤을 추는 효주.

나는 비공식 교사 효주 팬클럽 '효바라기' 1호가 되었다. (내가 만들었다.)

이 자식들, 어딜 감히 우리 효주를! 눈은 높아가지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순간순간은 이렇게나 다채롭다.

방금 전까지 바닥을 헤엄치던 진영이가 번쩍 빛나더니, 또 한편에서는 효주가 조용히 반짝인다.

교사 생활이 지루할 틈이 없다는 걸, 이런 순간마다 새삼스럽게 확인한다.


4. 나와 아이돌과 미친 학생 하나

내 수업 시간이 되면 효주가 교무실 앞에 서 있다가

싱긋 웃으며,

"선생님, 책 들어 드릴게요." 하는데 내 가슴이 다 설레었다.


효주를 좋아하는 남학생들은 늘 줄이 길었다.

우리 정신없는 전교 부회장, 축구 동아리 회장까지...

공통점은 모두 내 눈에 안 찬다는 점이다.


어느새 우리 셋은 같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점잖기 이를 데 없는 부회장님을 보니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효주는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뭔가를 내밀었다.

"선생님, 제가 인형 뽑기를 했는데요... 선생님이랑 똑같이 생겨서 갖고 왔어요."


흰둥이! 나는 유독 하얘서 고등학교 때도 곧잘 흰둥이로 불렸었다. 곧, 욕을 잘하는 게 탄로 나서 개둥이, 할매로 별명이 바뀌긴 했지만...


5. 키링처럼 흩날리는 첫눈

"효주는 어쩜 이렇게 예쁜 행동만 하니? 너무 고맙다."

나는 보란 듯이 진영이 눈앞으로 강아지 키링을 흔들었다.

진영이 눈이 좌우로 같이 흔들렸다.

아이고, 귀여운 녀석들.


"어엇? 선생님, 눈 옵니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첫눈의 빛이 미세하게 번져 오고 있었다.

창밖에는 아직 바닥에도 닿지 않은 가벼운 눈발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고요를 깨듯, 복도는 곧 함성으로 가득 찼다.


"우와아! 눈 온다, 눈!"

창밖의 운동장은 금세 흐릿한 흰빛에 잠겨 들기 시작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눈발처럼 가볍게 흩어졌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6. 첫눈이라는 함성 버튼

교무실까지 다 왔다.

진영이에게서 노트북을 뺏어 들었다.

"진영아, 효주 반까지 잘 데려다줘! 애들 뛰어다녀서 다칠라."

짐짓 엄하게 말하며 돌아섰다.

힐끔 돌아보니, 껑충 키가 큰 진영이가 효주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뭔가 말하고 있었다.

효주는 살풋, 제 손가락끼리 걸어 뒷짐을 지었다.


둘은 하얀 첫눈이 폴폴 날리고,

조금은 추운 복도를, 청춘 속을 걷고 있었다.

두 아이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흰 눈 사이로 찬 공기가 살짝 떨려오는 듯했다.


그 모습이 참 예쁘고 귀했다.

어딘가에 살짝 닿았다가 곧 녹아 스러지는

깨끗한 올 해의 첫눈, 첫 마음.


7. 일상 틈에 끼어든 반짝임

매일 반복되는 학교 생활 속에서도, 이런 장면은 문득 나를 멈춰 세운다.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계절은 현실보다 더 빛나고 따뜻하다.

앞으로도 눈은 또 오고, 겨울은 또 계속되겠지만.

오늘 같은 눈은 매년 처음이라는 이름표를 단다.


남은 겨울 속에서 아이들은 이 이름표를 사과 같은 첫 페이지에 붙여 놓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반짝이는 계절 속에, 그날의 아이들은 내 기억 속에서 늘 하얗게 내릴 것이다.


스쳐 지나간 그 한 장면이,

내게는 올해 겨울의 첫 온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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