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러스는 보아라
1. 서두와 계절 인사: 비틀린 계절의 입구
때는 약 두 달 전.
가을은 늘 어딘가 시간이 비틀려 있는 계절이다.
10월이라는 가을의 절기가 무색하게, 낮에는 아직 더운 어느 날이었다.
저녁 시간쯤 조금 선선한 때를 노려 태블릿을 챙겨 근처 커피숍에 갔다.
차를 다 마시고 나서려는 순간, 후드티를 푹 눌러쓴 여자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상한 예감이 스쳤다.
후드 앞면엔 나도 장바구니에 담아둔 바로 그 ‘Sin-sang’ 로고가 선명했다.
고개를 숙인 채 곧장 이쪽으로 와서, 피하기도 전에—
"퍽"
기어코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 틈에 하얀 봉투 하나가 떨어졌다.
2. 문안 인사: 안녕, 놀랐지?
"엇, 이거..." 봉투를 가리키는 사이,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분실물엔 손대지 않기에 그냥 두려고 했는데,
겉면을 본 순간 줍지 않을 수 없었다.
<시트러스는 보아라>
봉투에서 베르가못, 라임, 그리고 레몬 향이 희미하게 났다.
평소에 내가 쓰는 향수의 냄새였다.
여자가 사라진 쪽을 다급히 바라본 뒤,
다시 자리에 앉아 얇다란 봉투 속, 종이를 꺼내 읽었다.
3. 자기 안부: 나는 두 달 뒤의 너다
안녕하세요. 시트러스님.
놀라셨지요. 당신이라면 이렇게 해야 읽을 거라 알고, 그대로 적었습니다.
나는 두 달 뒤, 미래의 당신입니다.
당신은 나의 과거입니다.
"도라이인가?" 혼잣말이 튀어나와,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까지 읽으시고 '도라이인가?'라고 생각하셨지요?
아니라는 증거로, 당신과 나만 아는 내용을 말하겠습니다.
오늘 오후쯤에 브런치로부터 제안 메일을 하나 받으셨지요?
우리가 알다시피 출간 제의는 아니고, 브런치 협업 매거진 참가 제안 메일이었습니다.
계절의 절기마다 주제를 정해 글을 쓰는, 혼자라면 생각도 못했을 멋진 작업이지요.
당신이 방금까지도 고민하고 있었다는 걸 압니다.
덜컥, 신나서 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지요.
지금이라도 철회해야 하나 하고요.
안됩니다. 참가하십시오.
혼자서 쓰고 혼자 은밀히 좋아하는 것도 물론 재밌습니다.(인정)
하지만 멋진 작가님들과 같이 글 쓰는 건 좋은 기회입니다.
꼭 용기 내어 참여하세요.
그리고, ai와 그만 싸우십시오.
4. 사연: 너에게 이 편지를 보내는 이유
나는 또 놀라서 종이를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태블릿을 켜놓고 ai와 말싸움을 하던 중이었다.
'내가 글 쓰는 게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즐겁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시트러스님.'
'나만 즐거운 게 의미가 있냐고! 그리고 친한 척하지 말라고 했지? 사용자라고 불러!'
'사용자야, 계속 쓰십시오.'
글을 쓰는 이유를 돌아봅시다.
이것이 미래에서 과거의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유입니다.
압도적인 사연, 가슴 절절한 상처,
누구나 인정할만한 경력.
물론 내게도 끄집어내자면 뭔가 있을 테고,
이리저리 굴려서 그럴듯하게 쓸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선 내가 웃고 싶어서이고, 내 마음을 위로하고 싶어서입니다.
히힛 웃으며 쓰지만 초고를 쓰고 나면 웃음기가 싹 가시지요.
구조와 설계를 중시하고, 다층적인 글을 쓰고 싶기에
퇴고, 삼고 사고.. n고까지 갑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동어반복으로 뒤덮여 있다.'는 신념을 떠올리며,
게으른 문장도 쥐 잡듯 잡아냅니다.
나는, 그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5. 일화: 용기가 필요할 때 내가 밀어줄게
글을 쓰기 시작한 지 6개월. 이제 초보나 쪼랩이라는 말 뒤에 숨기도 민망했다.
여전히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황송하다.
글 하나를 클릭하여 읽는데 드는 시간과 품을 나는 잘 안다.
그래서 글 한편 한편에 정성을 들인다.
누군가는 읽고 한 번이라도 피식 웃기를,
잠시나마 창을 열고 새 바람을 들이는 시간이 되기를.
어쩌면 대단치 않은 목표일 수 있기에,
과연 글을 계속 쓸 가치가 있는지 매번 되새긴다.
아니, 그런데 이럴 거면
'로또 번호라도 알려줄 것이지, 미래의 나 새0야!'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또 알다시피, 어차피 나는 로또를 사지 않고,
숫자 감각도 남부럽지 않게 형편없습니다.
평행 우주는 대신, 우리가 이렇게 한 번씩 스치게 해 줍니다.
작은 용기가 필요할 때.
삶은 왜 이리 내게 불친절한가, 불만이 터져 나올 때.
우리는 어김없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를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과거와 미래의 나입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십시오.
뒷감당은 미래의 내가 하겠습니다.
6. 끝인사와 추신: 장바구니는 비울 것
가끔씩, '내일의 나야, 뒷일을 부탁해!' 하곤 했던 일이 떠올랐다.
쓰고 싶은 글을 밤새 쓰고, 책 좀 실컷 읽었다고 별 일이 나던가.
오늘처럼 고민하다 비싼 케이크 한 조각 사 먹어도,
다음 달의 내가 카드값도 다 갚아준다.
괜히 검지로 코를 한번 쓱 훔쳤다. '나 새0, 파이팅.'
용기가 필요한 순간 등을 살짝 밀어주는 것.
그런 것은 내가 하겠습니다.
언제든 당신의 뒤에는 내가 있습니다.
쓰고 싶은 만큼 씁시다.
당신이 쓰면, 미래의 내가 퇴고하겠습니다.
걱정 말고 쓰세요.
일단 무조건 한 명은 피식 웃길 수 있습니다.
당신은 늘 그랬듯 커피숍을 나서는 순간,
이 편지를 잃어버릴 것이며,
노란 은행잎을 보는 순간 이 일 자체를 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언제든 필요한 순간, 당신을 밀어주러 내가 나서겠습니다.
p.s 장바구니에 담아 둔 Sin-sang 티는 사지 마십시오.
후드 사이즈가 너무 옹졸합니다. Hu-bul 후드티를 추천합니다.
7. 날짜와 서명: 가을 끝에서, 미래의 네가
베르가못 향이 옅어져 가는 종이를 조용히 주머니에 넣었다.
왠지, 가는 길 어딘가에서 떨어뜨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쩐지, 휴대폰 속 장바구니도 비워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변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커피숍 문을 여는 순간,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흩어졌다.
가을의 도래를 알리듯,
서늘한 바람이 내 등을 슬며시 밀었다.
나는 웃으며, 계절과 시간 속으로 걸어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