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 예행연습

꽃을 드는 연습

by 시트러스

1. 끝은 늘 연습이 없다

시작과 끝 중 더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

내 경우에는 단연코 끝이다.

시작은 마라톤처럼 다 같이 우르르 달려갈 수 있지만, 끝은 늘 각자의 모습으로 남는다.


1월 초, 영하의 공기 속에서 중학교 3학년 졸업식 예행연습이 잡혔다.


1교시 자습 시간에 들어가니 여학생들 몇몇은 롤링 페이퍼를 쓰며 벌써 눈물이 터졌다.

슬쩍 훔쳐보니 '너에게는 개큰 미래가 기다리고 있어.'

'고등학교 가면 떡상각이야.' 얘들아, 도대체 어디가 슬픈 거니.


“그냥 생각만 해도 슬퍼요.” 그러니까 이걸 보고 운다고? 농담반 진담반 달래 가며 4교시를 지나 어느새 5교시. 아이들을 통솔하러 강당으로 갔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3학년 반별로 모 강당으로 향했다.

“꺅! 영어샘!” “00 샘! 안녕하세요!”

평소에는 수업도 안 듣던 아이들이 괜히 뭉쳐 있으니 더 난리다.

눈을 질끈 감고 익숙하게 고개를 외로 꼬며 앞줄로 갔다.


2. 내향인의 생존 연습

한참 무대에서 주의사항을 전달하던 3학년 부장님이 갑자기 마이크에 대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자꾸 부르시니 한번 안 모셔볼 수가 없네요.”

“000 선생님! 무대 위로 올라오세요.”


네? 아까 맞은 찬바람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콧물을 훌쩍거리고 있던 나는 사색이 되어 무대로 호출되었다.


한 번에 한 반은 웃길 수 있다. 삼삼오오, 그냥 쳐다만 봐도 아이들은 웃는다. 그런데 300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과 담임 선생님들이 한꺼번에 날 보고 있었다.


강당 위로 뛰어 올라가며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했다.

1. 이대로 뒤돌아 뛰쳐나가 학교를 그만둔다.

2. 숨겨왔던 재능을 뽐내며 춤과 노래를 선보인다.

3. 단, 숨겨놓은 게 없음.


3. 갑자기 무대

생과 사의 갈림길처럼 주르륵 스쳐가는 선택지 중 내가 고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이럴 경우, 내향인의 비상 생존 프로토콜이 발동한다.

마이크를 잡고 떨릴 때마다 발휘해 온 뻔뻔함을 꺼내 들었다.

참고로, 나는 교무회의 첫인사 때도 늘 이걸 써먹는다.


“Hello, everyone!”

왜인지 몰라도, 이 인사말을 하면 그렇게들 좋아한다. 뻘쭘한 자리일수록 파급력은 더 크다.


함성이 터졌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네, 3학년 여러분. 벌써 이 날이 왔네요.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는 손머리 하트를 했다.


“선생님! 노래해 주세요. 춤이요, 춤!”

나는 검지와 중지를 들어 내 눈을 가리키고, 휙 돌려 우성이를 가리켰다. 다들 빵 터진 사이, 얼른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4. 손에 남은 꽃

그 뒤로 연습이 이어졌다.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이들 간식을 뺏어먹고 농담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우는 친구가 있을까 봐 티슈도 주머니에 몇 장 챙겼다.


'이 정도면 오늘은 선방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9반 말썽꾸러기 민석이가 내 앞에 와서 꽃 모형 하나를 내밀었다. 작은 유리돔 안에 든 장미꽃이었다.


“이게 뭐야?” 물었더니,
아, 제가 또 샘을 위해 준비했죠.” 하고는 다시 제자리로 뛰어갔다.


그 사이 국민의례, 학생 대표 송사와 답사를 마치고 교무부장님이 무대에 올라오셨다.

“자, 여러분. 이제 조금만 더 연습하면 됩니다. 외부 인사 축하 말씀 들을 시간인데요...”


그때 9반 담임 선생님이 내 옆으로 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그 꽃, 민석이가 준 거죠?”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님이 웃으며 덧붙였다.
“쟤가요, 하루 종일 저 꽃을 손에서 안 놓더라고요.”


5. 경력직의 요령

꽃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부장님 말씀이 이어졌다.

“연습 삼아 어떤 선생님 말씀을 제일 듣고 싶어요?”

설마 나를 또 시키겠어?

“누구? 아, 000 선생님이요?”

또 나를 시키셨다.


나는 양손을 모아 심장을 누르는 시늉을 했으나, 부장님은 이미 마이크로 날 정조준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올라오세요.” 까라면 까야지.


역시 경력직을 뽑는 이유가 있다. 이번엔 선수를 쳤다.

“00 중학교 3학년 여러분. 함성 소리 한번 듣겠습니다.”

“와아아아!!!”


“어... 두 번 올라올 줄은 몰랐는데요...” 다른 선생님들도 웃음이 터졌다.

"3년간 고생 많았습니다. 오늘 잘 마무리 짓고, 내일은 더욱 잘해서 멋진 졸업식을 만들어 봅시다.”


6. 하루 종일 들고 있던 마음

또 춤추라고 하기 전에 아이들이 실망하든 말든 재빨리 내려왔다.

이제 마지막 순서. 교가 제창.


웃음이 가라앉자 넓은 강당이 서늘해졌다.

차가운 기운이 코끝에 걸려, 계절이 먼저 닿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손에 쥔 꽃 모형을 내려다봤다.

바람이 들지 않는 돔 안의 장미꽃이 애틋하고, 또 따뜻했다.

아이들은 저렇게 차가운 겨울 속에서도, 자기 방식으로 꽃을 들고 있었다.


“00 산 정기받아~” 역시 지형의 70%가 산인 나라의 교가답다. 슬며시 웃으며 아이들을 둘러봤다.


아니, 얘들아? 장난치기 바쁘던 녀석들이 어느새 하나 둘 눈가가 빨갛게 젖어들었다.

이제야 졸업식 연습도 끝나감을 실감한 것인지, 불러볼 일이 겨우 한번 남은 교가 때문인지.

소리 없이 퍼진 눈물은 반마다 스며들었다.


7. 겨울에 꽃을 피우는 법

“선생님, 이번에 자0 신상 나온 거 봤어요?” 패션에 진심인 친구들이 많았던 5반.

자기들끼리 시시콜콜 커플 정보를 전하며, 비밀연애라고 우기던 6반.

“축제 때 저희 반 오세요! 우리 부담임샘~” 날 챙겨 주던 7반.

“선생님, 가시죠.” 어느 반 할 것 없이 수업만 끝나면 앞다퉈 내 노트북을 챙겨들던 너희.

그 모든 귀하고 예쁜 너희들.


연습이 끝나고 교실로 가는 길.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선생님, 찾아올 거예요.”

“어우, 울면서 그런 말 하니까 무섭잖아.”


“선생님, 사랑합니다.” 웃으며 대꾸하다가, 넉살 좋은 민석이가 지나가며 한 말에 잠깐 멈칫했다.


너희는 이런 말을 계산 없이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그 순수함이 고마웠고, 한겨울의 청춘은 끝내 마음 한구석을 데워 놓았다.


강당 밖으로 나오자 겨울 공기 위로 햇빛이 얹혔다.

괜히 코끝이 또 시큰해졌다. 그래, 이건 찬 공기 탓이다.


오늘은 예행연습이라 괜찮다.

우리는 내일 또, 만날 수 있다.

나는 이별을 마음속으로 좀 더 미룬다.

내일은 또, 기쁘게 너희의 앞날을 기도할 수 있도록, 그 모든 찬란한 내일을 응원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오늘은 어디까지나

졸업식 예행 연습하는 날이다.

꽃을 들고 서 보는 연습까지 포함해서.


마무리는 늘, 숙제로 남겨 두는 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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