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저녁.
야근을 위해 백화점 지하 푸드코트로 저녁거리 포장하려 내려갔죠. 같이 간 여직원들은 마녀 김밥 먹는다고 급 변심하여 쪼르르 달려 나가고, 유부초밥집 줄 앞에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되었죠. 인기가 있는지 우삼겹 유부초밥이 딸랑 두 개만 남아 있어 한 개 집어 들고 다른 거 고르고 있는데, 뒤에 서 계신 여자분이 바로 집으며 감탄하더군요.
“우삼겹~ 차암 맛있겠다. 이따 차에 가서 먹자~”
스치듯 바라보니 비구니 스님 두 분.
이어서 내가 고른 명란크랩 유부초밥에도 큰 관심을 가지시더군요.
가을비 내리는 금요일 저녁 사람들로 붐비는 백화점 매장을 지나 포장 용기 들고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대놓고 고기를 달라는 스님들의 낯선 모습이 계속 떠올려지며, 우리 쪽 업계 표현으로 시험에 들더군요.
“고기를 맛있게 먹기 위해 야채를 곁들이는 것이 아니라, 야채를 맛있게 먹기 위해 고기를 얹어 먹는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 어느 현자처럼 채식파이지만, 내가 의문을 가진 건 그 스님들이 아니라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명이 과연 사람이 지킬 수가 있는 것일까”였죠.
집에 돌아온 자정 무렵에는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가 떠오르더군요. 유명한 그림 속 하나님과 아담의 두 손 끝에는 닿을 듯 말 듯 간극이 있죠. 여러 해석이 있지만 ‘신이 인간에게 허락해 준 자유의지’라는 설명이 끌리는군요. 자신의 형상을 닮은(in the image of God) 인간을 만들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명을 지으셨다는 성경의 말씀에 르네상스의 거장은 예술가적 상상을 더한 게 아닐까요?
지키지도 못할 규율로 상대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1인치의 창조적 터치라는 여지를 남겨두어 이성과 감성으로 자유롭게 선택하여 완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Here’s looking at you, kid.”
우리나라에선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라고 멋지게 의역되었는데, 내 영어실력으로는 도저히 번역을 못하겠군요. 이건 영화를 보면서 음미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지요.
스무 살 무렵 카사블랑카(Casablanca)를 봤을 때, 영화 속 일자(잉그리드 버그만)의 남편인 빅터 라즐로의 태도를 보며 무척 화가 났었죠. 아내가 한밤중에 옛 연인 릭(험프리 보가트)를 만나러 간다는데 전혀 말리지도 않고, 자기는 혁명 동지를 만난다며 혼자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대체 저따위 녀석이 한다는 혁명이란 게 뭐야!”라고 말이죠.
자신과 카사블랑카에 남게 되면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거라며, 나치 독일군 장교의 추적을 피해 남미행 비행기에 태워 보내지만, 일자는 평생 행복치 못했을 듯하군요. Rick’s Cafe Americain에 남아 ‘As time goes by’를 릭과 함께 부르며 사는 것이 더 어울렸을 텐데 말이죠.
창초적 터치라는 여지를 남겨둬야만 했을까요?
아니면 끝까지 붙들었어야 했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