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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속의 은사

by 이재열 Joy Lee

“What is the gift you currently hold in exile?”

(유배지에서의 기다림 속에서 여전히 붙들고 있는 당신의 은사는 무엇인가요?)


-David Brooks <How To Know A Person (어떻게 해야 한 사람을 제대로 아는가)> 중에서


전직 신문기자였던 어느 여류 소설가가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을 Pansy, 제목은 <내일은 또 다른 해가 뜰 거야 (Tomorrow Is Another Day)>로 정해 놓았지만, 편집자의 의견대로 수정을 했다고 하죠. 여주인공 이름은 스칼렛(Scarlett), 제목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로. 역시 사람은 귀인을 잘 만나야 하는가 봅니다.


단 하나의 대작만을 남겨 놓고 떠났기에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쓰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죠.


전기 작가인 윌리엄 맨체스터(William Manchester)도 윈스턴 처칠의 전기를 쓰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드는데, 요즘 출퇴근 길에 <The Last Lion (대영제국 최후의 사자)> 시리즈 중 제2권 ‘Alone(홀로) 1932-1940’를 읽고 있죠.


보험 약관 마냥 작고 촘촘한 글자들로 빼곡한 7백 페이지 짜리 벽돌책을 한 손으로 들고 (악력 훈련에 좋다), 다른 손으로는 밑줄 그어가며 지하철에서 읽고 있자니, ‘그래 이런 사람 세상에 하나쯤 있어도 되겠지’ 싶더군요. 거기다 예스러우면서도 문학적인 표현이 많다 보니, 성문종합영어로 공부했던 X-세대의 짧은 영어실력으로는 속도 내기가 쉽지 않군요. 그래도 하루하루 출퇴근길에 꾸준히 읽다 보니 어느덧 3분의 1 정도까지 왔네요.


오래전부터 이 기간에 관심이 많았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0여 년간 독일의 재무장을 뻔히 보면서도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국민들이 이를 외면했던 시기. 히틀러의 야심을 간파하며 정치인들과 대중에게 군사력 확장을 피력하지만, 옛 시대의 나이 든 전쟁광쯤으로만 여겨진 채 홀로 외쳐야만 했던 윈스턴 처칠. 그러나 결국 그가 옳았음을 역사가 증명하게 되죠.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안에 담겨 있다고 하는 돈바스 지역 비무장지대화 기사를 보며, 100년 전 히틀러에 점령당한 라인란트(Rheinland)의 운명을 떠올리는 건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인 걸까요?


끝이 없어 보이는 이 기다림 속에서 나 자신, 하루하루 여전히 붙들고 있는 은사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여러분은 어떠한가요?



오늘 오전 석촌호수 10km 러닝. 503 페이스.

아마 올해의 마지막 러닝이 될 거 같군요.

내년엔 부상 없이 꾸준히 달려 15km 이븐 페이스 달성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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