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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달림 Dec 10. 2019

1990년 그때 나 홀로 백두대간

 그땐 그랬지

『홀로 떠난다. 어디로랄 것도 없다. 더 이상 남길 것도 가지고 갈 미련도 없다. 가을 햇살에 나는 그대로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축복이 되리라.』산이 좋아 대학시절부터 이산 저산을 많이도 올라 다녔다. 국립공원과 도립공원에 있는 산은 물론 멀리로는 목포에서 삼화호를 타고 바다 건너 제주도 한라산은 물론 땅끝 해남 달마산까지 다녀왔다. 다음은 어느 산으로 갈까 서점에 책을 뒤적이는데 ‘하얀 능선에 서면’이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펼쳐 보니 ‘태백산맥 2천 리 단독 종주기’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 몇 장을 읽어 보니 이거야 하는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책은 1984년 1월 1일부터 3월 16일까지 76일간 부산 금정산에서 진부령까지 태백산맥을 여성 단독으로  종주한 산행기였다. 당시에는 산맥 종주란 산행이 없던 때로 산맥을 잇는 등산로가 제대로 없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설악산에는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고 한해 2m 넘게 내릴 때도 있었다

그녀는 능선 종주산행을 준비하면서 체력단련을 위하여 서울에서 일상을 택시는 물론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않고 걸어 다녔고 가을부터 매일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난방을 하지 않은 냉방에서 자면서 비박하는 훈련을 했다고 한다. 종주 중에는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씩 일주일치 식량을 지원을 받으면서 부산 금정산에서 진부령까지 태백산맥을 걸었는데 그녀가 걸었던 길을 걸어 보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백두대간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산맥이란 단어를 쓸 때고 대학교 산악부에서나 지리산 능선종주를 하던 시절이었다.


첫 산행은 서울에서는 북진보다 남진이 접근이 쉬워 진부령을 들머리로 잡고 4박 5일의 휴가를 내어 1990년 4월 7일 토요일 오전 근무를 끝내고 대간길에 올랐다. 지금이야 서울~양양간 고속도로 개통으로 2시간 만에 속초에 도착하는 짧은 시간이지만 당시에는 마장동 시외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하여 망우리고개를 넘어 홍천을 거쳐 원통까지 가서 버스를 바꿔 타고 진부령에 도착하면 반나절 이상이 걸리는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저녁연기가 피어오를 때쯤 해서 진부령에 있는 알프스리조트 앞에 있는 스키인의 집 ‘몽마르트 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즘은 인터넷이 있어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GPS가 있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지만 그 당시 아날로그 시대에는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산’ 잡지나 신문을 스크랩해서 정보를 얻었고 유일한 길잡이는 국토지리원에서 발생한 5만 분의 1 지도와 나침반이었다. 그때는 산악회 대장이라면 반드시 목에는 나침반을 메달 같이 걸고 있었고 지도 한 장은 필수품이었다.


대간길에서 첫 난관은 첫날 마산봉에서 맞이 하였다. 겨울 동안 내린 눈은 무릎 아래까지 쌓여 있는데 어디가 길이고 숲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당시는 겨울철에 능선종주는 꿈도 꾸지 않는 시절이라 지금은 그 흔하디 흔한 리본 하나도 없고 산행한 흔적이 없어 길을 찾는 데는 하루 종일 수도 없이 지도를 꺼네 전방 교차법, 후방 교차법으로 나침반을 보면서 길을 찾는데 길을 걷는 게 힘든 게 아니라 길을 찾는 게 더 힘들었다. 바위산을 이루고 있는 신선봉을 올라 내려 서면 미시령에 도착한다. 군용 도로인 미시령 개통된 지가 얼마 되지 않을 때라 그때가 휴게소 짓는 공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미시령의 바람은 알아줄 정도로 거센데 그게 양간지풍으로 봄철 양양과 간성사이에 발생하는 남서풍으로 위력이 태풍과 같아 공사장 합판이 바람에 날려 널브러져 있다. 너무 춥고 바람이 불어 공사를 중단하고 내려간 창고에 탠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내는데 밤새 바람소리에 잠 못 드는 밤을 보냈다.  다음날 황철봉 구간의 너덜바위 구간은 눈이 쌓여 늑대가 입을 벌린 듯 조심스러운 구간인데 무거운 배낭 무게로 기다시피 통과했다. 마등령에 올라서니 당시에는 속초에 살고 있는 상이용사가 움막집을 짓고 매점을 열고 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등산객이 많으니 장사가 잘 되는데 겨울철에는 손님이 없으니 매점에서 팔다만 물건을 넣어 두고 산을 내려가고 아무도 없었다.


마등령의 모진 바람이 싫어 움막집 안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팔다 남은 소주와 캔맥주 그리고 콜라, 사이다가 가득했지만 산을 타는 사람이 불경스러운 짓을 하면 죗값을 받을 것 같아 건드리지 않고 무사산행을 기원하며 공룡능선을 넘었다. 공룡능선 중간쯤인 1275봉 고갯마루에는 설악에서 자생하는 당귀를 끓여 당귀 차로 팔곤 했는데 그분을 설악골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흰색의 한복을 입고 지게를 지고 비선대에서 1275봉 고개까지 다니는 기인이 있었지만 겨울에는 만날 수가 없었다.


공룡능선이 끝나면 바로 희운각 산장에 도착한다. 희운각 산장은 1969년 2월에 지금은 '죽음의 계곡'이라 부르는 반내피계곡에서 제1기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동계훈련을 하고 있었다. 산악대 대장은 이희성 님으로 현역 육군 중령이었다. 협곡인 반내피계곡에서 낮 설상 훈련을 끝내고 곤한 잠을 자고 있다가 갑자기 눈사태를 만나 눈덩이가 원정대의 탠트를 덮쳐 원정대원 10명 전원이 사망한 아픈 사연이 있다. 당시 구조대로 참가한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30m의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그 계곡의 이름이 죽음의 계곡으로 불리고 지근거리에 있는 현 희운각 산장 자리에 사업가이자 서예가이신 최태묵 선생이 사재를 털어 그의 호인 희운 따서 희운각이란 산장을 지어 안전한 산행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백두대간은 물을 건너지 않는게 기본원칙이다. 소청으로 오르는 길은 대청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한다. 지금은 폐쇄된 길이지만 희운각 산장 뒤를 오르는 능선길이 제대로 된 백두대간 길이다. 그 능선을 타고 오르면 바로 대청봉 바로 아래에 닿는다. 남한에서 한라산과 지리산 다음으로 높은 1,708m의 대청봉을 내려 서면 지금은 철거되고 흔적도 없는 대청 산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군용 벙커로 사용하다가 폐허가 된 시설물을 속초에 사시는 분이 내부수리를 하여 대청산장으로 문을 열어 설악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하룻밤을 쉬어 가는 쉼터를 제공했다. 당시만 해도 지구 온난화란 단어가 나오기 전이라 겨울이면 폭설이 내려 적설량이 2m를 넘어 내리기가 다반사였다. 내부는 군대 침상과 같이 가운데 통로에 화목난로를 설치하고 양쪽으로 침상이 있었다. 별도 식당이 없이 가운데 통로에서 버너를 피워 밥을 지어 침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면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밤 10시까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왁자지껄 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당시 설악산 대청봉 아래에 있던 대청산장 내부 모습은 가운데 통로를 기준으로 침상이 있고 뒤에는 난로가 있다.

당시에는 119 응급 조난 구조에 대한 제도가 없던 시절이라 등산객들로부터 조난 신고가 들어오면 산장 주인이 이 곳 지리를 가장 잘 알고 있어 구조를 하러 나섰는데 그가 산장지기로 있는 동안 구조한 사람만 수십 명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가장 사고가 많은 때가 겨울철로 조난자를 구조를 하여 산장으로 업고 오면 산송장이라 침상에 뉘어 놓고 체온을 높여야 살 수 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구조자를 속옷만 남겨두고 옷을 벗기고 체온으로 안아 몸을 녹이는데 그게 완전 얼음장을 안는 느낌이라 했다. 그렇게 해서 살려낸 사람만도 십여 명이 넘고 그런 노력에도 끝내 살지 못한 사람도 부지기수라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돌아가신 사람은 부모나 형제가 기일이 되면 찾아오는데 살아서 돌아간 사람들 가운데 여성분 중에는 그 수치심 때문인지 찾아오지 않는다고 씁쓸해했다. 그 후 대청산장은 국립공원공단으로 넘어가고 대청봉 일원 자연보호로 산장은 철거되어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려 안타깝다. 백두대간길을 따라 남으로 걷다 보면 접근하기가 힘든 곳 중 하나가 구룡령이다. 


점봉산을 넘어 조침령을 지나 구룡령은 당시 도로가 개통되기 전이라 가장 먼 접근구간으로 양양에서 버스로 갈천약수까지 가서 구룡령에 올라서는데 2~3시간을 족히 걸렸고 양양에서 버스가 뜸해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자병산은 당시에는 보존을 할 수 있었는데 환경에 대한 인식이 저변 확대가 되지 못해 잘려 버린 대간의 등줄기가 원통하기 그지없다. 


다음 해 겨울에 소백산 구간을 지나다가 도솔봉 능선에서 날이 저물어 아무리 찾아보아도 바람을 막아줄 탠트 자리를 찾지 못해 능선상에 탠트를 쳤는데 영하 15도의 강추위에 바람이 그대로 탠트로 파고들어 침낭 속에서도 저체온증에 걸려 온몸이 굳어 옴을 느껴 자다가 새벽에 탠트를 철수하여 단양으로 탈출을 하기도 했다.

가장 위험했던 순간으로는 여름철에 긴바지가 걸 치적 거려 시원한 반바지 차림으로 대야산 구간인 악휘봉을 지나 잠시 등산로를  놓쳤는데 무심코 작은 바위를 뛰어내렸는데 “쏴 ~쏴 ~” 하는 소리가 들려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는 순간 까치살모사인 일명 칠점사가 똬리를 틀고 꼬리를 비비면서 여차하면 머리를 뽑아 물 기세다. 만약 그때 한 발자국만 칠점사 가까이 뛰어 내렸다면 반바지인 맨다리를 덥석 물었다면 지금 살아 있을까 하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렇게 남으로 남으로 한 걸음씩 더하기를 하여 지리산 천왕봉에 섰을 때는 그간의 흘린 땀방울이 생각나 가슴 뿌듯하게 다가왔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듯 힘든 만큼 성취감이 컸던 나 홀로 오직 두발로 우리의 등줄기 백두대간길을 완주할 수 있어 행복했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 하지 않았던가. 지금을 갈 수 없는 나머지 북쪽 대간길을 걸어 개마고원을 지나 백두산에 갈 수 있는 날 그 길을 걷는 날이 어서 빨리 오길 기원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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