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면서 해맞이
경자년 새해가 밝았다. 한 해가 바뀔 때면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러 서해로 동해로 가기도 하고 설악산 대청봉이나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해맞이 명소로 남산, 관악산, 아차산을 찾기도 한다. 새해 해돋이는 새해 첫날 떠 오르는 해를 보고 저마다 새해 소망을 기원한다.
올해는 특별한 해맞이로 새해맞이 일출 마라톤을 생각해 냈다. 한강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달려도 좋을 것 같다. 대회 하루 전날은 영하 10도에 체감온도는 영하 15도의 한파가 찾아오더니 대회날은 영하 6도의 기온으로 춥다.
겨울 마라톤은 추위에 대한 복장을 잘 갖추어야 개고생을 하지 않고 달릴 수 있다. 그곳이 강가라면 더욱 그렇다. 일출시간으로 출발시간도 평소 대회보다 빠른 8시 출발이라 아침 식사하고 이동시간을 계산하여 6시부터 서둘렀다. 대회장에는 최소한 30분 전에는 도착을 해야 출발 준비에 쫓기지 않는다. 서둘러 여의도로 가는 버스에 올랐는데 차장 밖은 여전히 깜깜하다.
작은 대회라 배번도 우편으로 보내 주지도 않고 현장에서 직접 받아야 하고 현장 접수까지 하는데 한분이 하신다. 추운데 떨면서 배번 받고 출발 복장은 아예 속에 입고 갔더니 빠르게 출발 준비를 끝내고 일단 짐은 맡겼다. 20분 전에 준비운동과 가벼운 러닝으로 몸 풀고 화장실까지 다녀왔다.
해맞이는 달리면서 할 수 있다.
해가 뜰 시간이 지나도 짙은 구름으로 서울지방은 올해 해돋이를 볼 수 없는 날씨다. 해돋이는 포기하고 마음 편히 달리기에만 집중해 보기로 했다. 매일 뜨는 해도 늘 볼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동해안으로 해돋이 간 친구가 있으니 사진으로나 대신 봐야겠다.
8시 정각에 풀코스부터 출발이다. 출발 신호인 징소리를 들으며 출발이다. 추위를 대비하여 긴 타이즈에 긴 티셔츠, 털모자에 목에는 버프를 두르고 손이 시릴 것 같아 벙어리장갑을 꼈다. 평소보다 중무장을 했더니 몸이 무겁다. 이런 날은 기록보다 즐런이 좋다.
초반 페이스가 km당 4분 40초까지 올라간다. 추위 날씨를 감안하면 조금 무리라 생각하고 4분 50초로 조금 속도를 내렸다. 늘 대회에서 자주 만나는 후배가 오늘은 초반부터 앞서 나간다. 완주 기록이 느린 후배인데 아무래도 의욕이 앞선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따라잡고 싶지만 오기로 달릴 수 없는 게 풀코스 마라톤이고, 아직도 달릴 시간이 많으니 나만의 페이스를 찾아 오버 페이스를 하지 않는 게 20년간 달린 마라톤 대회의 노하우다.
초반 2~3분의 오버페이스가 후반에는 20분이 늦어질 수도 있는 데미지를 받는 게 풀코스 마라톤이다. 힘은 있을 때 아껴두어야 후반에 생고생을 덜한다. 더구나 지금은 혹한기 마라톤 대회다. 참가자가 그리 많지 않아 띄엄띄엄 자기 속도에 맞게 달린다.
인생에도 자기 페이스가 중요하다.
5km를 지나니 안양천으로 접어든다. 지금까지는 한강의 겨울바람을 등지고 달렸지만 안양천부터는 강바람을 안고 달리는 구간이다. 조금 데워진 몸이 찬바람을 맞으니 금세 땀이 식는다. 다시 털모자를 눌러썼다.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아 힘이 들어간다.
신정교 앞 10km를 지나면서 이제야 조금씩 몸이 풀리다. 혹한의 달리기는 워밍업 시간이 길게 걸린다. 초반에 몸이 빨리 풀리는 젊은 친구 두어 명이 앞서 나갔다. 거리상 겨우 1/3을 지났으니 끝까지 지금의 속도를 유지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안양천에서 도림천으로 들어간다. 흐린 하늘에 가는 눈발이 날린다. 정월 초하루부터 서설인가. 도림천 구간은 아침마다 늘 운동을 하던 곳이라 길이 훤하다. 달릴 길을 잘 알고 있다는 게 마음이 든든하다.
15km를 지나면서 앞서가던 한 분의 페이스가 떨어지는 게 그분과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아직 갈길이 먼데 초반에 너무 빨리 달린 것 같다. 마음만 급해서 빨리 달려왔지만 몸은 마음을 따르지 못한다. 몸과 마음이 합해질 수준에 도달하려면 많은 대회 경험과 충분한 훈련량이 있어야 한다.
도림천은 하천의 일부를 복개하여 위에는 위로는 차가 다녀 GPS 신호를 받아 거리를 측정하는 가민 시계는 오차가 많다. 도림천이 끝날 때까지는 시계가 무용지물이다. 보라매공원 입구에서 다리를 건너 반대편 자전거 도로를 달려야 한다.
아직 길길이 먼데 벌써 시장기를 느껴 콜라 한잔과 바나나를 집어 들었는데 영하의 날씨로 콜라가 얼음 슬라이스가 되었고 바나나는 얼음을 깨물어 먹는 것 같다. 다행히 복개천 아래라 바람이 없어 좋다. 이런 속도라면 돌발 변수가 없다면 330은 넉넉하고 20분대 초반은 찍을 것 같다.
신정교 바로 위에 있는 반환점까지는 도로 상태가 좋아 달리기 좋다. 이제 걸음걸음마다 의식을 하지 않아도 절로 달려진다. 지금이 가장 편한 달리기를 하고 있다. 지금쯤 해돋이 간 분들은 아침식사를 할 시간이다. 한해를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는 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바램은 비슷할 것 같다.
새해 소망은 기도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대부분이 가족의 건강, 수험생이 있으면 입시 합격, 취준생들은 취업, 결혼 적령기에 있는 분들은 결혼, 환우가 있는 분은 쾌유를. 저마다의 소원은 많고 다양하다.
그런 소망들이 해돋이를 보고 기도만 한다고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건강을 소망한다면 당장 헬스장에 나가 운동을 해야 할 것이고, 수험생은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할 것이며,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낮추거나 자신의 몸값을 높여야 할 것이다.
풀코스의 절반에서 반환을 한다. 이제 왔던 길을 돌아가면 된다. 인생에도 반환점이 있다. 예전에 평균수명이 여든 후반일 때는 마흔 중반이 되면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 반환점 이후는 정리의 시간인셈이다. 소설로 말하면 클라이맥스를 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온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환점 이후가 아닐까?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데 반환점으로 향하는 주자들이 달려온다. 출발 때 보다 현저히 무거워진 다리에 피로가 느껴진다. 그래도 버티고 견디어 내야 한다. 그래야 완주를 할 수 있다.
30km를 지나면서 완충했던 에너지는 방전이 되어 길바닥 의자석이 붙은 듯 걸음을 재빨리 떼지를 못한다. 다시 안양천으로 나왔다. 흩날리던 눈발이 제법 하얗게 쌓였다. 잿빛 하늘이다. 초반에 기세 좋게 앞서 달리던 후배의 발걸음이 둔하다. 그 뒤를 따르다가 아직 초반의 속도가 유지되고 있어 앞서 간다. 그냥 가기가 미안해 "먼저 갑니다."하고 앞섰다.
긴 호흡으로 살아가자
마라톤도 인생도 긴 안목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 우선 돈이 있다고 해서 다 써 버리면 나중에 큰돈이 필요할 때 곤경에 처한다. 마라톤도 힘 있을 때 빨리 달리다가 나중에 체력이 떨어지면 큰 낭패를 당하는 건 어찌 그리 닮았나 싶다. 마라톤은 빨리 가는 경기가 아니라 결승선에 먼저 가는 경기다. 그래서 작전이 필요하다. 가장 효율적인 달리기는 처음 속도와 나중 속도가 같을 때다.
다시 한강으로 나오니 매서운 강바람이 파고든다. 남은 5km는 초반의 5km와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다. 같은 거리 같은 장소라도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마라톤의 37km 이후는 인간이 달리지 않고 신이 달린다고 한다. 몸속의 체력은 모두 방전된 상태로 오직 정신력으로 달린다.
그런 고비고비가 없다면 풀코스 마라톤이 힘들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고 달려야 하는 거리가 풀코스 거리다. 양화지구의 은근한 오르막을 지나면서 더 큰 고통을 감내하고 나면 이제 결승선이 가깝다.
희망은 마지막 힘을 짜낼 수 있다.
이럴 쯤엔 어디에서 힘이 나오는지 좀 더 힘을 낼 수 있다. 그건 완주의 희망이 보이면 없던 힘도 솟아난다. 희망이 소중한 이유다. 남은 거리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속도를 높여 본다. 거친 호흡을 토해 내며 결승선을 통과한다. 짧지 않은 105리 길의 긴 여정이었다. 경자년 새해 벽두에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가슴 뿌듯하다. 이런 마음으로 올 한 해 꿋꿋이 버텨 보자. 세상살이가 뭐에 힘들다고 마라톤 정신으로 또 한해를 버티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