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과 휴식이 있는 레드 메도우

울보 막내야 울려고 여기 왔나.

by 산달림


식량을 지원받을 수 있고 갈증을 달래줄 맥주와 한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이다. 거기다가 과일과 푸른 채소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4시에 일어나 짐을 챙기고 5시 30분에 출발하자고 했는데 3시 30분부터 옆 탠트에서 부스럭거린다. 한식이 먹고 싶어서 일까? 맥주 생각이 나서 일까? 오늘 걸을 거리가 30km가 된다. 어제 VVR에서 7시에 출발을 계획했는데 첫배가 9시에 있으니 10시에 출발을 하다 보니 어제 걷지 못한 거리를 오늘 더 걸어야 한다.


렌턴을 켜고 새벽에 출발하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길이다. 버지니아 호수까지는 고도를 높이는 오르막 길이다. 스위치백 길이고 밤에 휴식을 하여 걸을만했다. 아침에 출발할 때는 몸이 가볍지만 오후로 가면서 늘 힘든 시간이었다. 능선에 올라 서니 버지니아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에서 어제 실버 패스에서 만난 주홍 팬츠를 입고 깡마른 트레커를 다시 만났다.

3일간 함께 걸은 주홍 팬츠의 트레커

어둠이 걷히고 호수가 드러난다. 산이 내려준 물이 모인 호수의 수면에 산이 담겨 있다. 호수는 정지한 물인 듯 고요하지만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잔물결이 춤을 추고 있다. 켜켜이 밀리는 물결 속에 시에라네바다 산들이 파란 하늘과 함께 흔들리고 있다. 먼 길을 걸어온 옷은 누더기처럼 변했고 몸에는 지나온 산길의 고단함이 묻어 있지만 마음만은 평화롭다. 산속 호수는 자신을 둘러싼 모두를 보듬어 호수 속에 담고 있다.


오늘도 선두는 뭣이 그리 바쁜지 내뺀다. 막내는 뒤에서 힘들게 걷고 있다. 들쑥날쑥한 출발시간에 몸이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바쁜 게 좋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쁜 게 행복한 것일까? 곱씹어 보면 바쁜 게 아니라 남들을 따라가려고 바쁜 척하는 것은 아닐까. 음악에는 안단테와 라르고라는 느리게 와 아주 느리게 가 있고 알레그로와 포르테도 있다. 느리다고 좋은 음악이 될 수 없지만 빠르다고 아름다운 화음이 되지는 않는다. 느림과 빠름이 조화되었을 때 듣기 좋은 곡이 완성된다. 우리의 일상은 포르테 같이 살지만 가끔은 라르고로 살아야 아름다운 인생이 되지 않을까. 그 시간이 JMT를 걷는 시간이다.

호수 주변의 모두를 품은 버지니아 호수

오리 고개인 더크 패스를 넘으면 걷기가 한결 편하고 전나무 숲을 지나면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매캐한 연기가 산아래에 깔려 있다. 이곳에서 산불 발생지역과 그리 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디어 강에 도착하자 점심때가 되어 미숫가루를 타서 마시며 휴식시간을 갖었다. 여기서 1974년 한국에서 미군으로 Dmz에 근무했다는 70세의 어르신을 만났는데 요세미티 지역이 어제부터 열렸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준다. 그간 산불로 요세미티 지역을 통과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최대 관심거리였는데 그간 산불이 요세미티 지역 쪽으로 번지지 않고 비켜 지나갔다고 한다. 해피 아일스까지 JMT 전구간을 다 걷지 못하면 찜찜한데 이번 기회에 완주를 할 수 있다니 반갑고도 고마운 소식이다.


오후로 가면서 열기가 후끈하다. 요즘 LA 최고 기온이 화씨 100도라고 하니 올여름이 유난히 더운 것 같다. 섭씨 38도에 육박하는 기온이다. 레드 메도우를 앞두고 걷는데 등산화가 가관이다. 어떤 분은 고무줄로 등산화를 동여맸고 나의 잠발란 중등산화의 오른쪽 등산화는 입을 벌린 지 오래라 조심해서 걷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 신고 있는 등산화는 이번 JMT가 끝나면 그 수명을 다 할 것 같다. 그렇게 거칠고 험한 트레일 길이다.

AH5I7373.jpg
AH5I7394.jpg
JMT는 아직도 서부 개척시대 같은 생활로 운반은 말이 한다.(좌) 레드콘은 이 지역의 특별한 지질(우)

트레일 길 우측으로 붉은 산이 보인다. 붉은 지붕처럼 보이는 레 드콘이다. 땅속으로 흐르던 마그마가 화산으로 폭발하기 전에 부풀다가 멈춘 붉은 봉우리라 레 드콘이라 한다. 이름도 붉은 초원인 '레드 메도우'라고 부른다. 메마른 흙길을 걸으니 흙먼지가 풀풀 난다. 그곳은 불에 탄 나무들의 무덤으로 꼿꼿하게 서서 불타 죽은 나무들이 어느 몰락한 신전의 음습한 기둥처럼 보인다.


이곳은 7년간의 가뭄이 이어지고 1992년 8월에 낙뢰로 산불이 발생하여 20일간 이 지역이 불에 타서 나무들의 무덤이 되었다고 한다. 26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당시 화마를 짐직할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였고 아직도 당시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있다.


불탄 자리는 거대한 숲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이곳의 산불은 너무나 방대하고 그 규모가 커 진화도 할 수 없어 생태계의 순환고리 같이 자연 진화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다. 그 사이에 불탄 나무 아래에는 또 다른 나무가 새 생명으로 자라고 있다. 타다 남은 나무기둥은 당시 참담했던 흔적이 역 역하고 이곳이 유령이 사는 나무의 공동묘지 같이 그 모습이 처연스럽다.

산불로 나무들의 공동묘지에 새 생명이 자란다.

이곳은 나무들이 모두 불타고 없어 내려 쬐는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걷는 길인데 사막의 기후라 비가 내리지 않아 걸음걸이마다 일어나는 흙먼지가 등산화를 백구두로 만들어 놓는다. 갈증과 더위에 지쳐 갈 때 레즈 메도우 안내판이 마누라 만나듯 반갑다.


제일 먼저 매점으로 달려가 버드와이져 750mL 캔맥주를 1통씩 흡입하듯 마시고 나니 숨쉬기가 한결 편하다. 레드 메도우는 방갈로와 마구간 그리고 매점과 작은 식당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캠핑 그라운드가 있는 트레커의 오아시스다.


맘모스 리조트에서 이곳까지 포장도로가 있지만 환경문제로 일반차량은 출입을 할 수 없고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산아래에는 매머드 리조트라는 대형 스키 위락단지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올 수 있어 일부 트레커는 여기서 시작해 JMT남진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막네가 오지 않았다. 아침에 출발할 때 얼굴을 보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뒤에서 잘 찾아 오란 말만 하고 여기까지 와버렸다. GPS를 보고 온다지만 근 30km나 되는 거리를 혼자 걷게 한 건 그 시간이 너무 긴 게 아닌가. 그 혼자의 시간에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땅만 보고 GPS에 의지해 이곳으로 오고 있겠지. 그래도 이곳이 워낙 넓어 기다려 주는 게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아 다들 탠트 치러 간다고 떠났어도 남아서 막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근 한 시간이 지나서 막내가 힘들게 찾아와서는 울음부터 먼저 터트린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으면 그렇게 목놓아 울까. 오면서 엄마 생각 가족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걷고 또 걸었단다. 에휴, 장하다 막내야. 위로의 말을 전해주고 맥주를 몇 모금 마시고 나더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다. 캠핑 그라운드로 찾아가니 먼저 와서 기다린다던 지원대는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다.

AH5I7447.jpg
AH5I7482.jpg
레드 메도우의 식당과 가게(좌) 위락시설의 휴식(우)

내일은 하루 쉬어가는 날이라 여유롭게 꾀죄죄한 바지와 티셔츠를 빨아 널었다. 속옷과 양발도 3켤레 전부 빨아 널고 그늘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데 느지막이 지원대가 먹거리를 바리바리 준비해서 찾아왔다. 저녁 메뉴는 삼겹살에 육개장이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한식은 입에서 살살 녹는데 그동안 줄어든 위장이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이 느껴져 많이 먹을 수가 없다. 매점에서 빈속에 마신 맥주 탓에 술도 속에서 받아 주질 않는다.

여기서 긴장을 풀었다가는 아직 83km나 남은 JMT길이 만만한 길이 아니다. 걸을 날도 5일이 남았고 종점인 '해피 아일'까지 가야 이번 미션은 끝이 난다. JMT는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아무나 완주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걷지 못할 길도 아니다. 걸으면 걸을 수 있는 길 그게 JMT 길이다. 그 아름다운 길을 많은 트레커들이 걷고 야생의 자연을 느껴도 좋을 것 같다.

레드 메도우의 캠핑 그라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