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섬 사우전 아일랜드 호수

도노휴 패스 넘어 리엘 케년에 하룻밤

by 산달림

물안개 속에 푸른 여명이 밝아 온다. 검푸른 하늘의 별빛이 사위 워 가는 첫새벽에 시에라 네바다 산맥 아래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별빛이 무너지며 세상이 밝아 올 때 검은 실루엣으로 보이던 산들이 점점 선명히 다가온다. 어제는 겨울이 연상되는 우박을 퍼붓던 날임에도 태양열로 충전한 렌턴을 켜서 짐을 챙겼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린 일이다. 이제는 지겨워진 알파미지만 걷기 위해 먹고 JMT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이 호수는 루비처럼 아름다워 루비 호수인가? 에메랄드 호수도 지난다. 이곳 주변은 호수 이름들은 보석 이름으로 불린다. 사파이어 호수도는 없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다 해본다. 얼마 걷지 않아 거대한 호수가 열린다. 이게 그 유명한 사우전 아일랜드 호수다. 호수 안에 천 개의 섬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아무리 세어 보아도 천 개에는 어림도 없다. 미국 사람들도 허풍이 심한 듯하다. 호수 속에 빨려 들 듯이 반영된 산의 풍경이 상하 대칭으로 고스란히 호수 속에 담겨 있다.


며칠 전 실버 패스에서 만났고 어제는 가네트 호수에서 만났던 빨강 팬츠를 입은 그 친구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전생에 질긴 인연이 있나 보다. 3,000m가 넘는 이런 고산에 바다 같은 호수가 있다는 게 특별한 풍경이다. 때마침 한쌍의 오리가 호수에서 헤엄치는 모습에 마음이 편하게 다가온다. 이런 산속 호수까지 오리가 날아들다니 아름다운 모습이다. 많은 트레커들이 호수를 배경으로 이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쁘다.

JMT의 물길을 건너는 친환경 나무다리

요세미티에서 출발하여 JMT를 남진하는 트레커에는 사우전 아일랜드 호수가 처음 만나는 가장 큰 호수라 큰 감동을 선사하는데 북진하는 트레커에게는 그간 아름다운 호수를 너무나 많이 봐 온 탓으로 큰 감동을 주지는 못했지만 코고 아름다운 호수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곳에 하룻밤을 지내고 싶었는데 때아닌 우박이 쏟아져 시간을 지체한 탓에 어제 이곳까지 오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아일랜드 패스로 올라가는 길에 뒤를 돌아다보면 한눈에 호수가 들여다 보인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호수의 풍경을 다시 카메라에 담고 가슴에도 저장해 둔다. 아일랜드 패스는 높이가 3,116m로 꽤나 높은 패스지만 주변 지대가 높다 보니 그리 힘들지 않고 패스를 넘었다. 높이도 상대적인 것이라 주변이 낮으면 같은 높이라도 높게 느껴지는데 높으니 낮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본질은 낮지 않다. 우리는 늘 상대적으로 평가하면서 그 본질을 꽤 뚫어 보지 못한다.

주변 자연과 어울리는 통나무를 묶은 나무다리

이제 존 뮤어 트레일의 8개 큰 패스 중에 마지막 패스인 도노휴 패스를 남겨 놓았다. 3,369m로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패스다. 마지막 패스라 하니 아껴서 걷고 싶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훠이훠이 걷는다. 고개의 왼쪽으로는 라웰 산( Mt Lyell 3,997m)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아래로 도노휴 패스가 있다. 패스 아래는 스위치백으로 서서히 고도를 높여 가는데 돌계단으로 이루어지면서 왼쪽으로 크게 휘어져 패스를 오른다.


멀리서 보니 한 무리의 트레커인가 했는데 가까이 올라 가보니 국립공원 등산로 보수팀으로 4명인데 그중 2명이 여성이다. 일에는 성에 대한 구분이 없는 미국이다. 트레일 보수 장비인 긴 삽을 배낭에 넣고 바위 위에 서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여러 각도로 몇 장의 사진을 찍어 줬더니 사진을 보면서 만족해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직업도 좋을 것 같다. 그들은 근무 중이지만 이런 풍경이 좋은 곳에 오르면 추억을 남기고 싶나 보다.

도노휴 패스에서 만난 국립공원 시설 보수팀들

도노휴 패스 정상은 바람이 넘나드는 곳이라 금세 추위를 느낀다. 시계를 확인하니 11시다. 잠시라도 쉴 때는 뭐든 먹어 주는 게 장거리 트레킹의 원칙인데 하늘은 보니 먹구름이 이곳으로 밀려온다. 혹시나 하여 공원 정비 보수팀의 우두머리 같은 분께 하늘의 먹구름을 가리키며


"저게 비구름인가?"

"맞다. 비 구름이다."

"언제 비가 올 것 같은가?"

"곧 비가 올 것이다.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이다."

"고맙다."

서둘러 도노휴 패스를 넘어 내려오는데 돌길로 굽이굽이 돌아 고도를 낮춘다. 30여분 내여 오니 사방이 점점 어두워져 오고 우박과 비가 섞여 뿌린다. 배낭 커버를 씌우고 방풍 옷을 입고 서둘러 길을 내려오는데 작은 개울을 만났다. 다리가 없고 돌을 딛고 건너는 곳인데 겁 많은 미국인이 멈칫거리며 징검다리를 잘 건너지 못한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기온은 뚝 떨어져 서둘러 갈길을 재촉한다. 그들은 첫 번째 캠핑장에서 탠트를 서둘러 친다. 이제 겨우 12시를 넘었는데 좀 일찍 지 않나 싶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물길을 건너는 트레커들

리엘케년으로 내려오니 그간 보지 못한 가장 넓은 초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초원의 가장자리에는 물길이 있어 운치 있는 초원이다. 갈길이 여유로워 평소보다 일찍 탠트를 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하다 보니 그래도 18km는 걸었다. 내일은 투올로움 메도우까지만 가면 되는 일정이라 여유 있는 시간이다. 끝 간 데 없이 넓은 리엘케년의 초원이 있는 소나무 숲 속에 뚝딱 7개의 작은 집을 지으니 작은 동네가 금방 만들어졌다.


오랜만에 탠트 안에서 누워 있는데 한줄기의 소나기가 지나가고 나니 금방 날씨가 개이고 햇볕이 내려 쪼인다. 햇볕에 배낭 커버와 우의를 뽀송뽀송하게 말리니 기분까지 상쾌해진다. 모닥불터에 마른 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우니 송진이 많은 나뭇가지라 활활 타오른다. 불을 보니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불을 보면서 하는 말이 고구마를 구워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지 한다. 그러자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한 가지씩 말한다. 갈치 찌개가 먹고 싶어 하니 자장면이 먹고 싶다고 한다. 냉면도 하고 끼어든다. 각자 먹고 싶은 한식이 많기도 하다. 제대로 된 한식을 맛본 지 오래되니 한식이 많이 그리운 때다.


마음의 여유가 있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네.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사랑 클라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이 동요는 이곳 미국 서부시대에 골드러시가 한창일 때 일확천금을 꿈꾸며 몰려들던 이를 포티나이너(Forty - niner)로 불렀는데 그들이 만들어 부른 노래다.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에 시달리던 포티나이너들이 영양실조와 인디언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었다. 그때 금맥을 찾던 한 포티나이너에게는 클라맨타인이라는 딸이 있었는데라는 자조 섞인 노래를 부르게 된 이후 널리 퍼져 나갔다고 한다.


원 가사는 "깊은 산골 동굴 속에 금을 캐는 광부는, 노다지를 꿈을 꾸며 딸과 함께 살았네, 요정같이 사뿐사뿐 가벼야운 우리 아씨 예쁜 꽃신은 뚜껑 없는 상자 속에 클라멘타인 샌들 ~이고 마지막은 그 에비는 그렇게 애간장만 태웠네."로 끝이 난다. 이 미국 민요가 1919년 3.1절 전후로 소설가 박태원 님이 우리 정서에 맞게 개사를 하였고 어부가 아닌 이곳의 광부라고 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이곳 투올로메도우 지역은 자주 비가 내리는 지역이라고 LA에 사시는 교민이 알려줬는데 그 말이 딱 맞다. 어제도 오후에 우박과 함께 비를 맞았고 오늘도 오후에 우박과 비가 내렸다. 넓은 메도우에는 초원을 가로지르는 보행자 길이 있어 산책을 할 수 있다. 초원을 가로지르는 물길이 있어 더욱 멋진 풍경이다.


리엘케년의 끝 간 데 없는 초원

시장기를 느껴 중간 참으로 라면 1개씩 꺼내 라면을 끓였다. 배가 고플 때 먹는 라면 맛은 완전 환상적인 맛이다. 무슨 음식을 먹어도 맛있겠지만 으스스 추울 때 뜨근한 국물과 함께 먹는 라면 맛은 꿀맛이다. 하늘은 다시 맑아지고 구름은 솜사탕처럼 두둥실 떠 있는 오후에 오랜만에 한가히 탠트에 드러누워 생각의 시간을 갖으며 낮잠을 한숨 잤다.


물소리,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에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이것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이런 작은 여유에도 행복을 느낀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 그걸 끄집어내지 못할 뿐인데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행복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