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트레일 돌로미티
캠핑장에서 이틀을 쉬고 출발하는 날이다. 하루의 휴식으로 몸이 가뿐하다. 여행에서 휴식이 중요한 게 몸이 편해야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어젯밤 오늘 코스에 대해 고민을 했다. 다시 스코토니 산장으로 올라가 18B코스를 타고 가는 방법과 편안한 길인 마을로 내려가 18번 길을 걷는 방법이 있는데 전자는 전망은 좋은 반면 체력소모가 크다는 단점이 있다. 두길 모두 팔자레고 고개로 가는 길이다.
결정적 고려사항은 산장을 예약하지 못해 다음 캠핑장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거리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편안한 길인 24B 길을 걷다가 18번 길로 1차 세계대전 박물관을 거쳐 진행하기로 했다. 5시에 서둘러 탠트를 철수하고 길은 나섰다. 일찍 출발할 것에 대비하여 어젯밤에 캠핑장 체크 아웃을 미리 해두었다.
어제 하루 쉬는 날이라 라가주오이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왔더니 모처럼 느긋이 쉬면서 마음이 홀가분했는지 한나절 동안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도 남은 게 와인 한 병과 맥주 3병 채소도 몇 가지는 버리고 떠나야 했다. 웬만하면 술꾼들은 짊어지고는 못 가도 마시고는 간다고 하지만 과음 후의 술은 후회만 남나 보다. 산중에는 술이 남아도 처리에 어려움이 있다. 넘치면 부족함 보다 못하다는 교훈을 되새겨 본다.
이른 아침이라 산중 날씨는 쌀쌀하다.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걸어도 되겠지만 그래도 흙길이 좋고 포장길은 지그재그가 심해 오히려 길이 더 멀다. 인근 주민이 아침 산책과 조깅을 나온 마을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독일가문비 나무숲길 사이 길을 따라 걸었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산길은 신비감마저 느껴진다..
간혹 목장을 지나기도 하고 몇 채의 인가를 지나 고도를 높인다. 가끔은 지그재그 길이 심해 근거리로 질러 보기도 하며 언덕에 오르니 발파 로라(Rif. Valparola) 산장이다. 돌로미티 지역은 도로변에도 산장이 더러 있다. 이곳이 알타비아 9코스가 지나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돌로미티 지역은 거미줄 같이 연결되는 트레킹 길이 있어 1년을 걸어도 될만한 길이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알타비아 1코스를 걷고 돌로미티를 다 보았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곳 산장에서 잠시 어깨 쉼을 하고 가까이 있는 제1차 세계대전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시 이탈리아 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당시 오스트리아와 혈전을 벌이던 최전방 전선이 있던 곳인데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앞에는 당시에 사용했던 대포가 그대로 전시되고 있는데 1차 세계대전 박물관(Museo Della Grande Guerra)은 1914-1918년까지 전쟁에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전쟁으로 죽은 군인보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동사한 군인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만년설에 묻힌 당시 유해와 전쟁에 사용한 물품이 그 후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발굴되었는데 당시의 혹독한 추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박물관이 열리지 않아 외관만 둘러보고 길을 재촉하였다. 바로 앞으로는 2일 전에 올랐던 라가주오이 산장을 여기서 다시 본다. 팔자레고에서 바로 케이블카로도 올라갈 수 있는 산장이 2,752m의 높이에 있어 돌로미티의 일출 일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360도 파노라마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파소 팔자레고는 라가주오이로 오르는 고개로 분기점이 되는 곳이다. 차도를 따라 깊숙이 더 산골로 들어가는 라 빌라 마을로 가는 버스도 있다. 이곳에서 토파네 디 로즈(Tofana de Rozes 3,225m) 다가온다. 높이의 탓인지 거벽 중간에 구름에 걸려 있다.
440번 길로 접어 드니 초원이 펼쳐진다. 아베라우 산장(Rif Averau)을 오르는 된 비알이다. 이곳까지 리프트가 올라온다. 겨울철에 스키어들 위한 시설인데 여름철에는 트레커를 위해 운행한다. 이곳은 인기 지역이라 주변에 산장이 많다. 439번 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누볼라우 산장이다. 바로 뒤에는 라 구셀라 봉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바위 위에 자리하고 있는 누볼라우 산장도 전망이 뛰어난 산장이다.
앞으로는 돌로미티의 기암 중 하나이 친퀘토리(Cinque Torri)는 다섯 개의 바위를 만난다.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지역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 한다. 오른쪽이 대장 바위가 있고 왼쪽으로 네 개의 작은 바위가 있는 모습이 한가족인 아빠와 아이들 같다. 그 앞에는 친퀘토리 바위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스코이아톨리 산장이 자리하고 있다.
지아우 고개(Passo Giau)로 가는 길은 화창한 날씨에 나들이 나온 여행자들이 많아 소풍을 온 기분이다. 이곳은 코르티나 담페초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차가 올라오고 주변 전망이 좋아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역이다. 고갯마루에 있는 산장에 들려 이른 점심식사를 하려고 야외 의자에 앉았는데 아직 12시가 되지 않아 주문을 받지 않는다. 시간 하나는 철저히 지키는 이탈리아인들이다. 40여분을 기다려야 하기에 맥주 한잔씩 하고 간식을 먹고 자리에 일어났다.
436번 길로 접어 드니 이탈리아 아가씨 4명이 민소매에 핫팬츠 차림으로 트레킹을 와서 깔깔 웃으며 신나게 앞서 걷는데 맨 뒤에 가던 아가씨가 서둘러 걸으려다 넘어져 발목을 접절려 절뚝거린다. 괜찮냐고 하니 '씩' 웃으며 먼저 가라고 길을 내어 준다.
이곳에 암장이 많아 자일을 매고 헬멧을 쓴 젊은이가 빨리도 앞서 걸어간다. 돌로미티는 암벽의 천국인 듯하다. 왼편으로 치마 암브리 졸라(2,715m) 봉 옆의 암브리졸라 고개를 오르는데 이 길을 자전거로 내려오는 일행과 만났다. 이곳에는 자전거가 다지 못할 길이 없는 듯 걷는 길이면 어디서나 자전거가 다닌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니 먼저 올라 온 일가족이 도시락을 펼쳐 놓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도 계시는데 초원에 3대가 피크닉을 나온 모습이 부럽게 느껴진다. 저런 나이에도 이런 곳이 올라올 수 있는 건강이 부럽고 생활의 여유가 부럽다.
우측으로 몬드(2,455m) 산이 칼로 자른 듯 평평하게 늘어 있다. 어디 가나 개구쟁이 어린이인 여자 꼬마애 둘이서 꽤나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가 재미있다는 듯 내려다도 보고 있다. 부모는 말리지도 않고 대견하다는 듯 쳐다만 본다. 우리 같으면 위험하다고 난리 칠 일이다.
펑퍼짐한 산 능선을 따라 436번 길을 따라 걷는 길은 완만한 능선 내리막길이라 걷기 편한 길이다. 467길로 접어드니 산아래 산장이 보인다. 피우메 산장(Rif Fiume)이다. 목표한 캠핑장은 좀 더 내려가 도로변에 있는데 산장에 빈 침대가 있나 확인차 들어가서 문의하니 자리가 있단다. 굳이 캠핑장까지 가지 않고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
하루의 피로 해소에는 하우스 와인이 최고다. 2L를 주문하여 마시고 산장 앞에 나오니 풀밭에 뛰어노는 꼬마들의 웃음소리와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의 방울소리가 여기가 알프스임을 알려 주는 듯하다. 앞으로는 펠모산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산장 한귀퉁에는 유로 깃발과 이탈리아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예전의 이곳은 오스트리아 땅이었는데 아탈리아 땅으로 편입된 지역인데 이탈리라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어 지중해의 온화한 해양성 기후와 돌로미티 지방의 겨울 눈은 이탈리아를 관광대국으로 만든 지리적 여건을 갖추는데 일조를 하는 것 같다.
피우메 산장은 작은 산장이지만 펠모산이 앞에 있어 전망이 좋고 숲 속에 묻혀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일은 티시 산장까지 걸을 계획이 있어 예약을 부탁했더니 예약을 해 줬다. 내일은 캠핑장을 찾지 않고 편히 느긋이 걸어도 되니 마음이 편하다. 이제 돌로미티 트레킹도 종반으로 가는데 산중생활에 익숙해져 그리 불편함도 없다. 난 산 체질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