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정령 내려놓아야 할 것은 뭘까?
이곳 철 십자가에서 정령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등에 진 무거운 배낭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되지 않을까. 카미노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중 하나인 이에로(Hierro)에 오르게 된다. 라바날에서 출발하자 말자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펼쳐지는 주변 풍경을 바라보면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된다. 갈라시아 지방의 경계선이 멀리 보이고 힘겨운 순례자의 발걸음이다. 템플 기사단의 수사들이 산티아고 길을 지킨다는 신념 아래 철야로 보초를 서던 성채가 오늘날 순례자를 맞이하고 철 십자가 산을 오르며 집에서부터 가지고 온 돌을 올려놓고 내려놓아야 할 것을 생각하고 남은 순례길의 안전을 기도한다.
순례길에 있는 알베르게는 남녀 구분이 없이 순서대로 침대가 배정이 된다. 어제저녁에 잘 때는 옆 침대에 금발의 예쁜 유럽 중년 여자분이 있었다. 설마 했는데 남자 순례자들도 코를 골지 않는데 그 여자분이 심하게 코를 곤다. 밤중에 잠을 설쳐 늦게 까지 자지 못하고 새벽에 잠을 깨서 짐을 챙겼다. 코 고는 데는 남녀 예쁜 것 불문하고 곤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밤이었다.
ㄹ5시 40분에 알베르계를 나서기 전 호스피탈로 피터가 챙겨준 비스킷과 요구르트를 감사히 먹고 나서 밖으로 나오니 산 중턱이라 새벽 공기가 차갑게 느껴진다. 긴 순례자 생활로 내성이 떨어져 잔기침도 자주 나온다. 서서히 오름길인데 순한 오름길이다. 어둠 속을 걷고 있는데 뒤쪽에서 서서히 밝아 오면서 달빛이 사위 워 가고 먼동이 튼다.
첫 번째 마을인 소모사는 아직 어둠 속에 잠들어 있고 부지런한 순례자만 분주히 출발 준비하고 있다. 그간 대부분 평야 지대만 걸었지만 이제 산악지대로 지형이 바뀌었다. 4.6km를 더 걸어 다음 마을인 엘 간소에 도착하니 완전히 밝고 떠난 순례자와 짐을 꾸리는 순례자가 길을 나서려고 바삐 준비를 한다. 아침을 먹지 않아 순례자를 위한 가게에서 빵과 우유, 오렌지를 사서 나오니 일행은 기다리지 않고 걸어 꽤 멀리 걷고 있다.
같이 먹으려고 구입한 아침식사가 무겁기도 하고 시장도 하여 잠시 쉬면서 간단히 먹고 일행의 것은 배낭에 넣고 길을 재촉하였다. 라바날 마을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중세 기사 복장을 한 남자가 매를 조련하면서 손목에 얹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들 신기한 구경거리에 삥 둘러 구경하고 있다. 얼마의 돈을 주변 독수리를 팔에 얹어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라바날에는 순례자가 많이 쉬었다가 가는 마을이다. 성당 쪽으로 올라가는데 뒤에서 일행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일행이 상점에 들려 먹거리를 사서 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4인분의 식사가 준비되어 각자 산 것은 각자 먹기로 하고 성당에 도착하니 검은색으로 수도사 복장을 한 수사들이 몇 분 계시는데 그중에 한국 분도 계셨다. 한국 신부님에 알아보시고,
"한국분이세요?"
"네,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어제 어디서 주무셨어요?"
"아랫마을 무루이사에서 잤습니다."
"오늘 산을 넘겠네요?"
"예, 철 십자가를 넘어 아체보까지 갈까 합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좋은 순례길 되세요."
신부님의 축복을 받고 길을 나섰다. 그것도 한국 신부님을 순례길에서 만나다니 이것 또한 영광이고 축복이다. 내친김에 신부님 사진도 찍고 헤어졌다. 성당에는 한글로 된 성당 이용 방법도 깨알같이 자세히 적혀 있다.
순례길은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멀리 보이던 설산이 가까워진다. 폰세바돈은 철십자가 언덕을 넘기 전 마지막 마을로 예전에는 번성한 마을이었으나 순례자가 뜸해지면서 쇠락한 마을이었다가 다시 순례자가 많아지면서 활기를 되찾은 마을이다. 해발 1,400m의 마을이니 쌀쌀함이 느껴진다. 아직도 무너진 건물이 그대로 방치된 건물이 있다.
페로 철 십자가 언덕은 1,505m의 언덕에 올라 서면 카미노의 가장 상징적인 철 십자가가 언덕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 언덕 정상에는 선사시대의 제단이 있었고 로마시대에는 길과 교차로의 신이자 죽음의 신인 메리쿠리우스를 모시는 제단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가우셀로 수도원장이 첫 번째 철 십자가를 세우면서 중세의 순례자들은 십자가에 경배하며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봉헌했다. 그렇게 1,000년의 세월을 이어 오면서 순례자의 소망이 적힌 돌과 버리고 갈 물건들이 가득한 카미노의 역사적 장소가 되었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돌에는 빼곡히 소망이 적혀 있고 소망을 적은 종이를 묻어 두고 간다. 철 십자가에서 내려놓고 가야 할 것은 무엇일까? 등에 맨 진 짐 중의 하나가 아닌 자신의 마음은 아닐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건너편 산에는 지난겨울에 내린 눈이 아지도 다 녹지 않고 잔설이 남아 있다.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고 산속의 작은 마을에는 그리 많지 않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람 사는 곳은 거의 비슷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만하린 알베르게가 있다. 템플 기사단에서 운영하는 카미노중에는 가장 소박한 곳이다. 나무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지며 장작난로로 난방을 하며 수도가 없어서 우물을 사용한다. 당연히 샤워는 꿈도 꾸지 못한다. 템플 기사단 시절의 느낌을 맛보려면 하룻밤을 보내도 좋겠다.
이제 줄곳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많이 더운 날인데 고도가 높아 바람은 차갑게 느껴진다. 오르막은 체격 좋은 서약인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내리막 길은 자갈이 있어 미끄럽지만 중심만 잘 잡으면 그들보다 잘 걸을 수 있었다. 뱃속이 헛헛할 쯤이면 신기루 같이 나타나는 과일이 있다. 이동트럭에는 산미구엘 맥주가 있다. 갈증 해소에는 최고다.
지루한 내리막 길을 힘들게 내려가니 첫 번째 만나는 마을이 아체보다. 마을 입구의 바에 들려 다리를 쉬며 일행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새벽부터 오르막을 오르고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오느라 많이 지쳤다. 좀 이르기는 해도 이곳 공립 알베르게를 찾았다. 이곳은 베드 버그를 예방하기 위하여 배낭은 침대로 가지고 가지 못한다. 입구에 두고 침낭이나 옷만 들고 갈 수 있다. 좀 빨리 왔나 보다 부엌이 여유롭다. 가게에 가서 쌀을 사고 미소 된장국을 끓여 늦은 점심식사를 하였다. 밤만 먹으며 힘이 난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으로 사나 보다.
저녁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요리사 순례자가 스파게티를 해서 같이 먹자고 한다. 비용은 조금씩 부담하고 와인도 사고 근사한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 같이 카미노를 걷는다는 이유 하나로 모두 동지애를 느낀다. 이제는 지구촌이란 말이 어울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