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세브레이도 산타마리아 성당
오늘은 비 예보가 있었다. 그간 용케도 비를 잘 피해 다녔는데 갈리시아 지방으로 접어드니 비가 잦다. 밤새 알베르게 함석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다. 아무래도 길을 나서는 데는 비가 내리면 걷는 게 불편하다. 이제 하루에 30km 이상은 걷지 않기로 하고 남은 길을 아껴서 여유 있게 걸어도 계획한 날짜에 산티아고 대성당이 도착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출발을 좀 늦추어도 동행인은 깨울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 카미노 길에서 동행인의 부모 노릇을 하는 느낌이다. 아침부터 깨우고 갈 안내도 해야 하고 식사시간도 잡아야 하고 온전히 나의 시간을 기대했건만 자꾸 방해를 받는 것 같다.
오늘 아침은 깨워 줬는데도 뭘 그리 꾸물 거리는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말이 나온다. '뭘 그리 ~ ' 하고 말문을 닫으면 나를 본다.
나도 완전하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려 들지 말아야 한다. 너나 잘하세요 하고 마음속으로 나를 보면서 출발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다. 그런데 아직도 렌턴을 찾고 화장실도 가야 한다고 허둥댄다. 그러면서 미안한지 먼저 가면 뒤 따라오겠다고 하여 길을 나섰다.
남남인 남자 둘이서 한 달 이상을 같이 순례길을 걷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과 성장 환경이 다른 성인이 늘 한결같을 수는 없는 듯하다. 때로는 잠시 따로 걸어도 좋으련만 언어가 되지 않는다고 굳이 함께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 생각을 늘어놓으니 서로가 불편해지기도 한다.
순례길은 아스팔트 길을 따라 고도를 높여 간다. 1.7km를 혼자 천천히 걸어 루이텔라마을을 지날 즈음에 따라와서 함께 걸었다. 흐린 날씨가 금세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로 더워서 겉옷을 벗었는데 비가 뿌려 배낭 커버를 씌우고 걷는데 이제 산길로 접어든다.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서는 날인데 이곳은 척박한 지역이고 대서양 너머로 서풍이 불어오는 갈리시아 산맥으로 날씨가 급변하여 비가 자주 오고 소나기와 뇌우가 있기도 하며 안개가 자주 끼는 지역으로 시골 벌판에는 우리네와 비슷한 산골 벌판에는 양이나 돼지, 닭과 더불어 소가 풀을 뜯는 목장이 있다.
갈리시아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곳이지만 영적인 풍요로움을 갖고 있다. 이 지역은 대대로 평화로우며 전통을 손상하지 않은 곳이다. 가톨릭 신앙이 고유 토속 믿음을 압도할지라도 이교도적인 과거 전통은 결코 완전히 없어지지 않을 곳이기도 하다.
작은 산골동네를 몇 개 지나면서 경사는 점점 가팔라지니 우리나라 산을 오르는 것 같아서 걷는데 별 무리가 없는데 평지만 걷던 유럽인들은 힘들게 걷는다. 그들은 주로 평지만 걸었고 우린 산을 오르내렸으니 산을 잘 걷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열심히 피자를 팬에서 구워 여자애들과 같이 먹던 앳된 총각이 혼자서 걸어 올라온다. 유럽도 가사분담이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하는 일이다.
점점 고도를 높여가니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지면서 스위스의 한 마을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는 소보다 말을 더 많이 키우는데 어디 가나 농부의 일과는 비슷하여 순례자가 걸어도 늘 보던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길을 간다. 혹시나 해서 '올라!' 해도 무심코 지나가는 그의 어깨는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오름이 끝나기 전 카스티야 레온 자치구를 벗어나 루고주의 갈라시아로 들어선다는 표지석이 있고 이를 지나면 오 세브레이로 성당에 닿는다. 9시 50분에 성당 앞에 서니 안개가 짙게 끼고 바람도 부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지만 배가 고파서 어제저녁에 싸 둔 도시락을 바람이 불지 않는 공터에서 먹고 성당으로 가니 여기가 가톨릭 성지로 많은 신자들이 버스로 순례를 왔다.
오 세브레이로 성당은 836년 지어진 곳으로 카미노 길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며 산타 마리아 왕립 성당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이라 한다. 가톨릭에서는 기적이라고 하는 성찬식용 잔과 받침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오 세브로이로의 기적은 그 옛날 독실하나 가난한 소작농이 엄청난 눈보라를 뚫고 미사에 참석하러 이 성당을 찾았는데 오만한 사제는 미사에 참석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성의 없이 미사를 올리고 농부에게 빵과 포도주를 건네었는데 그 순간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고 성당 안의 마리아상도 이 기적적인 광경에 고개를 기울였다고 하는 오 세브로이로의 기적이 전해 오는 성지다.
성당에 들어가 세요를 받고 나오니 으시시 추운 게 손도 시리고 겨울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방한복에 장갑까지 낀 순례자도 있는데 카미노 길은 어떤 지역은 너무 더워서 힘들고 오늘은 너무 추우서 힘든 그런 시련이 있다.
이 또한 순례자가 겪어야 할 시련이라 생각하고 다음 마을로 길을 걷는데 장갑 낀 손과 귀가 많이 시린 순례길이다.
추워서 길을 재촉했는데 1,270m에 바람의 언덕이 있는 걸 보니 여기가 예로부터 늘 바람이 심하게 부는 곳인 것 같다. 그곳에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 힘든 순례 자상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
언덕을 내려 서니 바람이 진정되고 열심히 걸으니 몸이 좀 훈훈해지는 것 같다. 산등선을 따라 폰페리아에 도착하니 12시 40분이다. 시간상으로는 더 걸을 수 있었지만 다음 알베르게까지 거리가 멀고 급할 게 없어 산중 알베르게인 '아 레볼레이라'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이곳 알베르게는 시설도 훌륭하고 다녀간 한국인이 남긴 방명록에는 한식이 무한 리필되고 또한 와인도 무한 리필되는 알베르게라고 하면서 꼭 쉬어가라는 글귀가 많다. 이곳에는 칼도 가예고란 시래기국 맛이 나는 스프가 우리 입에 맞는 게 딱이다. 이런 산중에 이런 훌륭한 알베르게가 있어 좋은데 가격도 8유로로 착하고 더블침대도 있고 개인실도 있는데 가격은 좀 더 비싼 것 같다.
아침은 6시 저녁은 7시에 있다. 여긴 마을이 없어 마켓은 없고 알베르게에서 모두 해결하여야 한다. 다행히 오후에 날씨가 개여서 아름다운 스페인의 목가적 풍경을 볼 수 있다.
오늘은 육체와 영혼이 아프고 마음도 힘겹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자연히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과 침묵 속에 나는 계속 걸었다. 평화는 스스로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교훈을 실천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마음의 평정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좌우된다면 나는 자유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