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스타가 있는 이유를 알았다.
아체보에서 평소보다 조금 늦은 05시 25분에 일어나 1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이곳에도 잠자는 순례자가 있다. 불을 켜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짐을 챙기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공립 알베르게는 침대가 부족해도 문전박대는 하지 않고 이슬을 피할 수 있도록 잠자리를 마련해 준다. 이곳 알베르게는 베드 버그 예방을 위하여 1층에 배낭을 비롯한 신발 등은 두고 침낭만 들고 올라와 잠을 자는 곳이라 1층 현관이 많이 어지럽다.
숙소에서 아침에 먼 길을 떠나는 순례자를 위하여 비스킷과 뜨거운 물 그리고 커피를 준비해 두었다. 커피에 비스킷을 찍어 먹고 간식으로 비스킷을 몇 개 챙겨 넣고 6시 10분에 길을 나섰다. 서쪽하늘 산에 달이 걸려 곧 지려한다. 이제 곧 동쪽 하늘엔 오늘의 해가 뜨겠지. 내려가는 산길에 풀냄새가 싱그럽다.
위도상으로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지방이라 이곳에 살고 있는 새와 나무들도 비슷한 게 많다. 이른 아침 산새들의 지저귐도 그렇고 뻐꾹새의 노랫소리도 너무나 흡사하다. 그 흔하던 강남에서 날아오는 제비를 요즘은 거의 보지 못했는데 여기는 그 옛날 처마 밑에 보았던 제비를 자주 만나게 되고 더 많이 본다. 이른 아침 순례길에는 집 나온 개들이 떼를 지어 길거리에서 서성거려 조심해야 했다. 여차하면 스틱으로 내려치려고 조심해서 걸었다. 숲 속 산길에는 흐드러지게 핀 들꽃들이 싱그럽다.
이라고 산의 내리막 길은 몰리나세카에서 끝난다. 메로엘라 강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된 다리를 건너면 귀족들의 문장이 새겨진 집들이 늘어선 셀레 레얄로 들어서게 된다. 유서 깊은 마을이 마음에 든다. 하루쯤 머물며 쉬어가고 싶은 곳이다. 마음은 쉬고 싶은데 오늘 걸어야 할 길이 있기에 길을 걷는다. 걷는 것에 너무 집착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몰리나세카 마을을 지나고 한적한 길가 풀밭 양지쪽에서 어제저녁에 준비해 둔 도시락을 비웠다. 그래도 한국인에겐 밥심이라고 속이 든든하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32km 이상을 걸어야 한다. 그건 폰페리다를 지나면 15km는 알베르게가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작은 가게나 바가 있어 마음은 든든하다.
폰페리다는 인구 6만의 오래된 도시로 유명한 템플 기사단 성이 있다. 철로 만든 다리란 뜻의 폰페리다는 페르난도 2세가 순례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이 마을을 템플 기사단에 맡겼다. 이곳이 포도의 재배에 적당한 독특한 기후 탓으로 유명한 와인인 "비에르소"가 생산되는 곳이라 많은 여행자들이 찾기도 하는데 순례자들은 유적지보다는 순례길에 집중한다.
어제 철 십자가를 넘고부터는 성당의 모양이 로마식에서 이슬람식으로 규모도 작게 지어져 있다. 갈라시아 지방과 남쪽 지방의 문화 차이 인듯하다. 폰페리다를 벗어나기 전 이온음료를 한잔씩 하는데 오늘 날씨는 대단하다. 반바지를 입고 싶었지만 마땅히 갈아입을 곳이 없어 바지도 걷고 셔츠도 말아 올리고 걸었다.
이곳의 대형 마트인 Dio에서 캔맥주와 콜라, 과일과 딱딱한 빵을 사서 성당 앞 그늘진 의자에서 먹고 걷는데 정오를 지나니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본격적인 열기를 맛봐야 했다. 스페인의 한낮 날씨는 피부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강열하다. 노출된 살이 익을 정도로 직사광선이 강하게 내려 쬐는데 스페인에 시에스타가 있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일행의 걷는 속도가 떨어져 조금 앞서 걸었는데 독일인 친구가 따라와 함께 걸었다. 그는 영어는 전혀 못하고 오직 독일어만 하는데 그래도 자주 만난 탓에 정이 가는 친구다. 간단한 말로 의사소통을 하고 꼭 말이 통하지 않아도 표정이나 행동을 보면 안다. 같이 걸으니 지루하지 않아서 좋았다. 처음 그레뇽에서 같은 숙소에 머물면서 만났는데 거의 비슷한 속도로 걷기에 자주 만났다.
오늘의 목적지인 카카벨로스에 접어드는 길은 양쪽으로 포도밭으로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이다. 물로 목을 축이며 힘들게 걸어 카카벨로스에 접어들었다. 여기서 독일인 친구를 먼저 보내고 일행을 기다렸다. 혹독한 더위에 지친 일행은 좀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전화를 걸어보니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 하겠다.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이는데 완전 노인 맞다. 이제 체력도 노인이고 걷는 자세 또한 그렇다. 그걸 누가 막겠는가? 알베르게는 이 도시 끝에 있다. 강을 건너는 다리를 건너서 모습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수도원이 었는지 건물 또한 세월을 느낄 수 있다. 성당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삥 둘러 숙소가 배치되어 있다. 알베르게 중에 유일하게 호텔처럼 더블룸이라 아늑해서 좋다.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은 양동이에 물을 받아 놓고 발을 식히고 있다. 걷느라고 발에 불이 났나 보다. 이곳 알베르게는 총 72명을 수용할 수 있다. 날씨가 좋아 다들 빨래하느라 분주하다. 이런 날씨에 빨래는 금방 마른다.
먼저 온 한국인 2분을 만났는데 후반으로 오면서 체력적 부담을 많이 느낀단다. 발바닥에도 테이핑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게 고행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다들 찬물을 받아 발을 담그고 그늘에 누워 있는 모습이 가관이다. 다행히 wi-fi가 잘 터져 그간 전하지 못한 소식도 알리고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다.
배낭을 정리하고 시내 나들이에 나섰다. 인구 5천 명으로 부근에는 가장 큰 도시이고 중세에는 카미노 순례자를 돌보기 위해 설립된 구호시설이 5개나 있었던 순례자들이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된 와인이 인기가 높아 와인박물관이 여러 곳에 있다. 돌아오는 길에 숙소 앞 강에는 더운 열기를 식히려는 젊은이들이 강물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다. 비키니를 입고 잔디밭에 놀고 있는 스페인의 젊은이들이 부럽다.
숙소에 주방이 없어 쿠아 강 다리 건너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내일 아침 먹을 빵을 사서 돌아왔다. 이곳의 물가가 싼 편이라 주머니가 가난한 순례자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오늘도 무사히 32.7km를 걸을 수 있어 감사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