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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Feb 05. 2022

해마다 달리 다가오는 엄마

엄마, 미안해!

"나는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이렇게 내뱉던 그때 대학생이던 나는 엄마가 오십을 넘기며 신세 한탄을 넘어 짜증과 신경질이 도를 넘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엄마를 잠잠하게 할 극약처방으로 독한  말을 내뱉었었다. 그러면 엄마는 허망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내 이 고생을 하는 거 아냐."

"그건 부모니까 다 해주는 거지.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참고 산다고."

"남편 복 없는 년이 자식복 있을까. 내가 뭐 바라는 건  없지만 , 부모 맘도 모르고 너 혼자 잘난 줄 알지만 네가 나 나 없으면 주변에서 개밥의 도토리밖에 더 돼."

"엄마가 나한테 뭘 그리 해줬는데...."

그러면 엄마는 아무 소리 없이 멍하니 있었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지금 나는 그때 나를 쥐어박고 싶다.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사무치게 후회가 되는 말들이다. 사실 그때도 나는 잘 알았다. 엄마가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산다는 것을. 하지만 집에 있으면 하루 종일 계속되는 엄마의 신경질을 받아낼 인내심이 내겐 없었고  엄마를 멈추게 할 것은 내 배은망덕 한 말들 뿐이었다.


엄마가 쓰러지기 전날 유난히 짜증이 심했다. 얼굴빛이 영 안 좋은 엄마가 동네 내과에도 다녀왔지만 그저 과로와 신경과민이라고 쉬라는 얘기만을 들었을 뿐이고 밤이 될수록 더 날카로워져 두통약을 찾는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약국을 찾아 두통약을 사온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엄마의 신경질을 극에 달하게 하는 일이 될 줄이야. 늦은 밤에 계집애가 겁도 없이 나돌아 다닌다고 화를 내는 엄마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지 아비 닮아서 밤도깨비 마냥 밤에 설치면 마냥 좋지. 에미가 어찌 되든 내팽개쳐 두고."

"아, 정말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그때 나는 같이 짜증을 낼게 아니라  좀 더 이성적으로 엄마의 증상을 차분히 묻고 근처에 대학 병원이 둘이나 있었는데 함께 응급실을 같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내 철딱서니는 그 생각을 못했고 다음날도 속이 메스꺼워 밥 한술 못 뜨겠다는 엄마가 해주는 아침밥을 먹고 학교 갔다가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서야 쓰러져 있는 엄마를 발견하고 119를 불렀다. 응급조치가 너무 늦어 엄마는 그 뒤 4년 동안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있다 돌아가셨다. 엄마가 뇌출혈로 혼수상태에 빠지고서야 나는 엄마가 늘 이야기하던 청개구리처럼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나름  한다고 했지만 환자 관리를 잘 못해 엄마 등에 욕창이 생기기도 했고 거의 대부분 콧줄로 미음이나 주스류로 연명하던 엄마는 제대로 음식을 못 먹으니 나날이 말라 돌아가실 무렵에는 나 혼자도 엄마를 번쩍 안아 올릴 정도로 깡말라 있었다. 그때 엄마의 담당의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효녀 심청이네'니 '네 엄마가 효도받고 가네"라는 말을 하면 나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도록 엄마한테 미안한 심정이었다.


 25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20대 후반 내내  좀 더 잘하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하고 보냈고 30대가 되어선 세상에서  '개밥의 도토리'가 되어 엄마의 말이 사무쳤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신 게 남들이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일이며 여자가 호주가 된다는 게 법적으로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주택 청약 통장 하나 만드는 데도 친척남자로 보증인 겸 보호자를 만들어야 했던 일을 겪으며 여자 혼자 돈 벌며 자식 공부시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깨달았고 엄마에게 그제서야 존경심이 생겼다.  그리고 사십이 되어서 나는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감정도 감추며 살았단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40대 초반에 이혼하고 혼자 산 엄마에게 사십 후반부터 이모들이 괜찮은 사람 있다며 소개하려 할 때 나는 엄마가 정말로 그 남자들을 만나러 나갈까 봐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적극 추천해줄 일이었는데.... 아마 엄마는 나만 생각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내 욕심 때문이었을 거다.

 그리고 내가 오십을 넘어 중반을 달리며 엄마가 생애 마지막 대략 오 년간 왜 그토록 신경질이 많고 분노가 많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좀 더 철이 든 딸이었다면 엄마에게 갱년기가 왔고 몸이 쇠약해져서 그랬다는 걸 눈치 야 하는데... 누워서 끙끙 앓지 않으니 엄마의 짜증일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어리석음과, 몸은 딸리고 일하기는 힘든데 늦게 낳은 딸을 보면 막막했을 텐데,  우울증도 있었던거 같은데.... 그리고 무엇보다 많이 외로웠을 엄마를 이제서 느낀다.  


  코로나로 암 치료로 엄마를 찾아간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설 명절을 지내며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며 엄마 생각이 간절해졌다. 앞으로도 계속 항암제를 투약해야 하지만 뼈로 전이된 암이 조금 희미해졌다는 것에 마음이 가벼워졌다는것도 알려야 할텐데. 하늘에서 이미 다 알아버렸겠지만. 근래 항암제가 이제 누적되니 슬슬 경미하게 부작용이 있다.  끙끙 앓지는 않지만 무언가 하기에는 기력이 달리는 몸에 짜증이 나다 보니 엄마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러다 든 생각이 엄마를 엄마 나이가 돼서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엄마처럼 안 살 거야' 독하게 말했고 정말 자식에 얽매애이지 않고 엄마처럼 살지 않지만 내가 엄마보다 잘 살고 있지 않아 더욱 미안함이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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