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이 되던 해, 1월 어머니와 함께 명동의 백화점에 갔다. 사돈댁에 보낼 물건을 사고 나서 어머니 옷 좀 보자고 하셨다. 나는 부인복 코너로 가려는데 어머니는 먼저 영캐주얼 코너로 가자고 하셨다.
"나 얼마 전에 오버랑 정장 옷 사잖아요?"
"요즘 젊은 애들은 어떤 거 입는지 좀 보자. 요즘 세상에 너처럼 팔다리 들어가면 그냥 입는 애가 어딨니?"
어머니가 진열된 파란색 스웨터를 하나 집어 입어 보라고 하셨다. 내가 옷을 피팅룸에서 입어보다 가격태그를 봤다. 생각보다 0이 하나 더 붙은 고가였다.
"애가 달라 보이네."
"어머, 딱 따님 맞춤옷이네요."
점원과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는 어머니를 끌고 한 편으로 가 "엄마 너무 비싸. 난 싫어 이런 거"라고 말하고 얼른 옷을 벗고 나왔다. 그런데 어머니가 점원에게 옷을 싸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어머니가 그 파란 스웨터를 못 사게 할 요량으로 짜증을 냈다.
"난 싫다니까. 나도 취향이 있어."
"따님 특이 하시네요. 다른 아가씨들 같으면 좋다고 입고 갈 텐데."
"아휴, 망신스러워. 내가 내 딸 사서 줄 거야. 어디 안 입나 보자. 싸줘요."
"난 안 입어, "라고 매장을 나와 버렸다. 그러면 어머니가 그냥 날 따라 나올 줄 알았지만 기어이 스웨터를 사셨다. 대신 친척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본다던 어머니는 자신의 옷을 포기하셨다. 너무 부담스러웠던 선물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스웨터를 입을때마다 "거봐 사길 잘했지,"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뒤로 그 파란 스웨터 이십 년도 더 입었다.
작년에 항암제와 호르몬 억제제 부작용으로 점점 탈모가 심해져 여자 대머리가 됐다고 언니에게 자주 투덜거렸다. 연말에 언니 집에 오래간만에 갔더니 언니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모자 세 개와 손 떨리는 가격의 가발을 사놓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맘에 안 든다는 이유를 들어 반품하러 가자고 했다.
"이모 맘에는 안 들어도 엄마가 꼭 이걸 사줘야 엄마 마음이 걱정에서 벗어나는 거 같아. 내가 보기에도 이쁜데 그냥 쓰면 안 돼요? 그래야 엄마가 마음 편하대잖아."
조카가 하는 말에 수긍이 갔다. 내가 탈모 고민을 멀리 사는 언니에게 털어놓으며 속풀이를 할 때, 언니는 내 말에 속앓이를 했던 것이고 모자와 가발을 사 모으며 위안을 삼았을지 모르겠다. 옛날 파란 스웨터 얘길 하며 부모형제에게서 받는 과한 선물이 마음 불편하다는 내게 언니가 말했다.
"그렇게 퉁퉁거리리면 내 성의가 무시받는 거 같잖니? 내가 사 준거 잘 써주면 그 걸로 그 값어치를 하는 거야."
집으로 돌아와 다시 홀로 지내는 요즘, 옷에 맞춰, 그날의 분위기에 맞춰 모자를 바꿔쓰며 만족하고 있다. 나도 조카에게 무리해서라도 좋은 것 사주고싶고, 사서 주고나면 이모노릇 했다고 위안 삼을 때가 많은 걸 보면 어차피 입을 거 "어머 너무 예뻐. 맘에 들어요, " 할 걸 그랬다 싶다. 그게 선물을 가치를 가격태그 보다 더 높이는 일이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