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에 우경은 짚신말고 가죽로퍼와 짝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난 짚신 말고 가죽구두랑 짝할래."
"그러려면 너가 가죽구두가 되야 짝이 맞지."
우경은 여태 발에 맞는 짝을 찾지 못했고, 신발을 짝짝이 신으면 불편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녀는 짝을 맞춰 신을 짚신도 가죽로퍼도 모두 벗어버렸다. 맨발로 살다 보면 굳은살이 배겨 신발이 없어도 될 줄 알았지만 맨발은 아프고 위험하다. 우경은 발 편한 편리화가 간절했다.
어릴 적 소꿉친구들과 만나려 지하철역에서 내려 혜화동 로터리를 향해 걷던 우경의 눈에 그의 이름의 적힌 간판이 들어왔다. 이지운 치과. '그 일까?' 우경운 걸음을 멈추고 빨간 벽돌 건물 3층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3층 간판을 가만히 서서 쳐다만 보는데 우경은 전속력으로 100 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이 가빠졌다. 우경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동네에 저 이름으로 치과를 열었다면 그가 맞다. 당장 3층에 올라가 보면 그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우경은 나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초록색불빛이 깜박거리는 횡단보도를 빠르게 건너갔다.
“지운 오빠 있잖아. 첫 번째 부인이 결혼하고 일 년 만에 급성 백혈병으로 죽었잖아. 그리고 다시 재혼했지? 근데 그 두 번째 와이프도 재작년인가 작년 초에 교통사고로 또 죽었대. 그 여자들하고 궁합이 안 맞은 건지, 우리 할머니 말처럼 지운 오빠 팔자가 여자 잡는 팔잔지……. 마음 추스르려는 건지 애들 때문인지 본가로 들어왔다더라. 그리고 몇 달 전에 로터리에 서점 건물 3층으로 치과도 강남에서 옮겨왔대.”
수다스러운 중년 여자들이 다섯이나 모였지만 아무도 세라의 말에 호응을 하지 않았다. 혜화동 터줏대감 세라는 샐쭉하게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을 은희가 깨며 말했다. “우경아, 너 지운오빠랑 다시 만나보면 어때? 나는 너 혼자 사는 거 안쓰러워. 톡 까놓고 애 딸린 홀아비라지만 치과의사에 성격도 좋잖아. 이제는 그쪽 집에서 집안 갖고 트집 잡을 수도 없을 테고. 어차피 말 나왔으니 말인데 너 치과 한번 가봐. 하다못해 스케일링이라도 받고 와? 혹시 아니 다시 인연이 이어질지.....”
“야, 그만해” 모두의 시선이 우경을 향했다. “안 그래도 오다 간판 봤어. 긴가민가했는데..... 세라 덕문에 궁금증해소 했다. 하지만 풋풋하던 시절이야기지. 가슴앓이도 열정적으로 하던,.……. 이젠 그럴 기운 없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주 내내 지운이 우경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랑은 기적을 낳았다. 하룻밤 벼락치기로 드라마틱하게 성적이 오르내리던 우경이 지운이 다니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일 년을 공부에 매달려 같은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인문대 건물보다 치의대 건물을 더 많이 드나들며 지운 근처의 여학생들에게 선언했다. "이지운 오빠 찍으러 도끼 들고 원정 왔어요. 열 번, 스무 번 계속 찍을 거예요" 지운의 얼굴은 빨개졌지만 "야, 꼬마, 너 많이 컸다"며 우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요일에도 우경은 지운에게 껌딱지처럼 붙었다. 그날도 그랬다.
주일 아침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우경과 지운은 교회를 빠져나왔다. 손을 꼭 잡고 둘은 창경궁 돌담을 따라 낙원상가까지 걸었다. 미로 같은 골목길 한옥에 ‘사주, 궁합, 작명’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을 때 한 시간 전 예배당을 나온 두 사람은 거침없이 궁합을 보러 문턱을 넘었다.
“아이고 이런 사주끼리 만나기도 힘들겠네. 둘 다 사주에 도화 살을 품었구먼. 여자분은 두 개인데 이 남자분은 셋이나 있네.”
‘그래서 천생연분인 거예요? “
“음........”
우경은 사주에 도화살이 있다는 소리를 이미 들었었다. 우경의 어머니는 도화살이 뭐냐고 묻는 그녀에게 ‘기생팔자’란 간단한 설명에 긴 한숨을 쉬었었다. 그런데 지운의 사주에는 도화살이 더 많다니, 우경은 “흐흠, 여자는 가생팔자라던데 그럼 남자는 남사당패 팔자쯤 되나요. 하하.”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서로 그 도화살 막아주면 되겠네요” 지운도 한마디 거 들었다. 둘을 흐뭇하게 보던 사주 가는 말했다.
“그렇지. 어찌 보면 도화살을 가지면 사람들 손을 많이 타지만 외로운 팔자라고도 해요. 옛날에는 사주에 도화가 있다면 남자는 주색으로 패가 망신하고 여자는 기생이 되거나 정부와 타향으로 도망간다고 이야기했지만 요즘에는 인기 살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니 하는 일만 잘 선택하면 오히려 좋아요.”
“난 복숭아 알레르기 있는데 도화살이라니, 결국 사주도 해석하기 나름이지” 지운은 그렇게 코웃음 쳤다. 하지만 우경도 지운도 천생연분이란 말을 들으려는 기대와 달리 사주가에게 돈 주고 도화 살이란 덤터기만 쓴 것 같아 꺼림칙했다. 교회 장로님의 살가운 둘째 아들로, 기타 잘 치고, 공부 잘하는 교회 오빠인 지운에게 선택받았다고 생각한 우경에게 인생은 달콤했다. 열흘을 못 가는 복사꽃처럼 그러나 지운이 군의관으로 강원도로 떠나고 우경도 사회에 나서며 맛본 쓴 맛으로 둘의 관계는 시들시들 멀어졌다.
한 주 내 내 신경 쓸 일이 많았던 우경에게 치통이 찾아왔다. 밤새 시달린 그녀는 아픈 어금니를 꽉 물고 지하철을 탔다. 치과의자에 누운 우경은 지운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몸에 전율이 흐르고 더 아팠다. ‘내가 왜 여길 왔을 왔을까. 미련 때문에 정말 미련한 짓을 하는 군’ 우경은 자신의 입 속을 들여다보며 어쩌면 지운이 자신을 비웃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의 사업 부도와 더불어 부도 처리된 젊은 날! 늦었지만 다시 꿈꿀 수 있을까? 아픈 기억이 우경을 파고들었다. 세기말의 어수선함이 나라 곳곳에 퍼지던 그때. 많은 사람이 회사에서 퇴직을 당했고 인수 합병되는 대기업체의 명운에 무수한 중소기업체들은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그런 현실 앞에 사랑도 무너져 내렸다.
지운의 어머니를 볼 때마다 교회권사님 특유의 친절한 말투에서 냉기를 느끼던 우경은 어차피 이어질 인연이 아니라면 자신이 떠나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 건 그녀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골판지 제조업체가 부도가 나고 나서였다. 오래간만에 서울에 온 지운과 만난 우경은 유학을 갈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친하지도 연락도 하지 않는 미국으로 이민 간 사촌 언니 핑계를 댔다. 그녀는 그곳에 가서 공부하며 일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운전을 하며 우경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지만 명륜동에서 혜화동으로 그리고 삼선교를 지나 성북동 길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무래도 외국 학위가 더 먹히긴 하지.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들어가라. 집에 데려다줄게. “
우경은 성북동 집이 이미 경매로 넘어갔고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돈암동의 무허가 옥탑에 산다고 알리기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운은 성북동의 그녀가 살던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웠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내렸다. 그리고 지운에게 손까지 흔들며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갔다. 낯이 익은 경비원은 그녀의 이사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우경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서성대며 열을 센 후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그의 차도 경비원도 보이지 않았다. 밤 11시가 넘은 언덕길에는 사람은커녕 차도 지나치지 않았다. 분명 익숙한 길인데 드문드문 높이선 가로등의 불빛에도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았다. 보도블록이 유난히 울퉁불퉁했다. 마을 버스정류장이 보였을 때 우경은 반가워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승강장 벤치에 앉아 우경은 막차를 기다리며 깊게 한숨을 수 없이 내쉬며 한참을 땅이 꺼졌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땅바닥을 응시했다.
그날처럼 깊은 한숨이 나오는 걸 입을 벌린 채 참자니 고역이었다. 우경의 신경치료가 끝나고 지운은 그녀의 손에 쪽지하나를 쥐어줬다. 우경이 치과 진료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보니 그의 휴대전화 번호였다. 밖으로 나온 은 우경은 혜화동 로터리 전봇대에 기대고 서서 그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보고 또 봤다.
‘위로가 필요할 거야’, 중년이 된 그 빛나게 멋지던 교회 오빠에게 측은지심이 밀려들었다. ‘팔자가 센 건지 여복이 없는 건지. 내가 연분인데 차서 그런가?’ 우경은 지운의 사주에 도화살이 셋이나 있다는 생각이 났다. ‘어쩌면 내 무의식이 이 사람을 밀어내야 내가 살 수 있다고 나를 조종했나. 불경하게 난 참’ 지운의 저세상으로 떠난 부인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자 여태 감성에 눌려있던 이성이 깨어나 속삭였다. ‘네가 위로하지 않아도 저 사람은 너보다 잘살고 있어. 네 앞가림이나 잘해. 네가 저 사람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고 싶다고? 네가 기대고 보살핌을 받고 싶은 거잖아.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첫사랑이란 허울로. 저 남자가 아직도 너를 흔드는 걸 보니 확실히 도화 살이 여전히 잘 작동하나 보네’
선이 고운 여자의 몸처럼 아름답지만 까슬까슬 잔털에 덥석 베어 물지 못하는 복숭아처럼 우경은 지운에게 몰입할수록 온몸에 알레르기가 일어났다. 먼지 털듯 간지러운 곳을 손으로 툭툭 털었다. 그 바람에 그의 번호가 적힌 종이가 떨어져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