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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Aug 11. 2023

우렁각시  우롱하기

설레발 치는 남녀

   도서관은 퍼시빌딩 맞은편에 있었다.  우경의  휴대폰이 열람실 테이블 위에서 요란스럽게 진동했다. 그녀가 전화기를 얼른 집어 들었다. 그의 전화였다. 오리엔테이션 때 사우디 왕족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가 그녀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 시선을 무시하며 우경은 우선 통화버튼을 눌렀다. “나 도서관, 잠깐만요.”자리에서 일어서 나가며 소곤거렸다. 우경은 뻑뻑한 방화문을 열고 열람실 밖에 계단에 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밖으로 나왔는데....”

“괜찮으시면 저랑 저녁 하실래요. 지금 공학관인데....”

“지금 당장?”

“ 안 돼요?”

“아니, 돼요. 퍼시 빌딩 앞에서 봐요.”     

 두 사람은 퍼시 빌딩 앞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걸었다. 우경이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그가 생각날 때면 상상하던 모습이 현실이 되었다.


“상담이랄까 여기 생활에 고민이 생겼는데 아무래도 나이  많은 누나가 좋을 것 같아서.”

나이 얘기에 우경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그녀의 설렘이 움츠러들진 않았다

 “요즘 혜연이 때문에 미치겠어요.”

워즈워드 광장 앞 건널목에서 그가 말했다. 혜연이란 말이 나오자 우경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너 때문에 미치겠다. 둘이 잘되게 연결해 달라는 소리를 하는 건 ……. 설마 아니겠지?’

.

“같은 한국인끼리 신고도 할 수 없고. 스토킹이랄까? 혜연이가  몰래 제 기숙사 방에 들락거리는 것 같아요.”

우경의 돌덩이로 얻어맞은 마음은 어떤 생각도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패배감이 찾아왔다. ‘내가 밀렸구나!’ 우경은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둘이 따로 만나는 사이였구나. 그러니 방도 들어가지?.”

“기숙사 기한 연장 때문에 부탁하려고 몇 번 보긴 했는데 ……. 그게 다예요.”

‘나한테 변명할 필요는 없지. 어장 관리하는 얘였어, 너?’ 우경은 그에게 향한 갈망을 잠재우려 그를 비난하는 여러 생각을 떠올렸다.      

“기숙사 학생 리 담당이니 비상 열쇠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근무하는 날 그때 제방에 들어오는 거 같아요. 오늘은 좀 섬뜩하기까지 했어요. 나 없을 때 누군가 내 흔적을 보고 치우는 거, 감시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뉴레이크의 우렁각시네.” 우경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우렁각시는 젊고 예쁘지 않아요? 걔 소문에 뉴레이크에 미혼 남자 박사과정 들어오면 다 기숙사 학생담당이라는 거 이용해서 전화하고 찝쩍댄다고들 하던데. 걘 여기 공부가 아니라 남자 잡으러 온 거 같아요.”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까 직접 말하는 게 좋지 않나?”

“그럼 만나야 되잖아요. 싫어요. 누나가 혹시 기회 있으면 넌지시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

“흠... 이런 건 좀. 내가 나서면 자존심 상할 거 같은데. 기숙사 연장도 도와주고 했으니까 친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 같은데.”

평소 뉴레이크에 오래 있었다고 우경에게 텃세를 부리는 혜연을 얄밉게 봤지만, 지금은 그녀를 옹호했다.

“내가 부탁 들어줘서 고맙다고 밥사고 술 샀으면 됐잖아요. 내가 골치 아파서 여기 한국 여자들을 끊어야지. 정말!  아 누나는 빼고요.”

그가 우경을 향해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그러나 우경은 더 이상 설레지 않았다.  


 집에 데려주겠다는 그에게 우경은 해가 아직 안 떨어졌으니 괜찮다며 헤어졌다.  북위 55도, 여름밤, 10시가 다 돼서야 어둑해진 워즈워드 광장의 불빛이 환해졌다.  우경은 일곱 빛깔 불빛이 번갈아 비추는 워즈워드 동상 둘레 계단에 걸터 않았다.  바닥 스크린에는 워즈워드 시들이 번갈아가며 떴다.  “My Heart Leaps Up(내 가슴은 셀레고)" 이란 시가 노란 불빛 속에 눈에 들어왔을 때 우경은 고개를 쳐들어 워즈워드 동상을 쳐다보며 말했다.

“남자가 말이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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