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창골 샌님 Apr 27. 2023

착각

모든 게 멈춘채 그대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은이 온라인 쇼핑 몰에서 주문한 구두가 배달 됐다. 문 앞에 두었다는 택배기사의 메시지를 받고 현관문을 열고 상자를 집어 들 때 옆집 문이 열리며 모자와 외투를 보라색으로 맞춰 입은 할머니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어디 좋은데 가시나 봐요?  화사하게 입으셨네요.”

은이 인사를 하자 할머니가 인사를 받으며 물었다.

“화사해 보인다니 다행이네. 사람들이 늙어 주책이라 할까 걱정했는데. 근데 새로 이사 왔어요?.”

은은 말문이 막혔다. 화장도 안 하고 외출복을 입지도 않아 할머니가 자신을 못 알아본다는  생각이 든 은은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목이 늘어났지만 편해서 버리지 못하고 계속 입는 흰색 면 티에 무릎이 늘어난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 ‘이런 모습을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할머니가 본 적이 없었나.’은은 아리송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데요, 저예요. 오히려 한동안 안보이셔서 전 어디 편찮으신 건가 했네요.”

은은 자신을 몰라보는 할머니에게 반격 아닌 반격을 가했다.

“내가 착각을 했구먼. 미안해요. 팔십이 넘으니 눈도 침침하고 혼자 겨울나기가 힘들어서  겨울 동안 아들네 집에 있다 왔지. 그럼 일 봐요.”

 ‘오늘은 컴포트화를 신으셨네! 나이는 어쩔 수 없구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은은  작년까지만 해도 족히 5센티는 돼 보이는 굽이 달린 구두를 신고 아들이 사준 지팡이를 내동댕이치던 꼿꼿한 멋쟁이 할머니에게도 인지 장애가 온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빌라 출입문을 해 느리게 걸어 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은은 애처롭게 쳐다봤다. '집이라고 너무 아무렇게나 하고 있었나. 나도 나이 들어 사람도 못 알아보고 그럼 어쩌지,’ 비혼 독신으로 혼자 살며 병치레를 하는  은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나이 듦과 고독사이다. 은은 비듬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푸시시한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불편한 생각을 흐트러트렸다.  삐리릭, 2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한 은은 얼른 택배상자들을 챙겨  집안으로 들어왔다. 띠리릭, 은의 집 현문이 잘 닫혔다는 소리를 낼 때 2층 여자가 또각또각 하이힐 굽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휴,”은은 거실 앞에 상자를 내려놓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추레한 모습을 더 이상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는 듯.

  은은 오랜만의 외출 준비에 분주했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변신의 과정 첫째는 안경을 벗고 콘택트렌즈를 끼는 것이었다. 은이 화장을 끝내고 외출복을 입고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살폈다.  ‘그래, 여전히 나도 차리면 봐줄 만해.’  그녀는 보건 마스크를 썼다, 얼굴이 반쯤 가려지자 큰 눈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눈가에 아이섀도를 칠하고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올린 눈이 더 크고 깊어졌다. 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옆집 할머니가 날 못 알 볼만하네.’ 은은 여전히 봐줄 만하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은이 유방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견디는 중에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의 사회 활동에 제동이 걸렸다. 게다가 암이 전이되면서 쓸개도 빼고 자궁도 난소도 적출해 냈다.  장기들을 빼냈는데 은에게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은신의 폭이 집안과 병원으로 한정될 무렵 전염병 확산 방지 일환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에 은은 쾌재를 올렸다. 암 치료 때문에 모든 사회적 활동을 그만두고 칩거를 하며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있다고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녀를 짓누르는 소외감이 사라지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겁게 무겁던 몸도 가벼워졌다.  은의 항암 치료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주던 공포와 거리 두기도 모두 끝이 났다. 외국에서 십 년 만에 귀국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은은 오늘을 위해 준비한 새 구두를  꺼냈다. 구두 굽 높이만큼 높아진 자신이 세상과 다시 만난다는 설렘이 충만해져 은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새 구두의 뻣뻣함에 그녀는 걸음걸이를 조심스럽게 조절해야 했다.   

  늦은 오후 전철 내부는 책가방 맨 학생들과 장바구니를 든 노인들로 사람보다 짐들이 더 북적였다. 은이 선 앞자리 승객이 바로 다음 역에서 내렸다. ‘운이 좋은 날이네.’ 은이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려 할 때 출입문 곁에 채소 이파리가 삐죽 삐져나온 핸드 캐리어를 붙잡고 엉거주춤 서있는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앉아 있는 젊은이들은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눈을 감고 졸고 있었다. 은이 팔을 뻗어 할머니의 어깨를 두드렸고 돌아보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자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할머니의 캐리어를 은의 자리로 옮겨 주었고 할머니는 재빠르게 자라에 앉았다. “아이고 고마워라.” 은은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할머니와 멋쩍은 시선 교환을 피해 자리를 옮겼다. 새 구두가 은의 발을 조였다. 새끼발가락과 뒤꿈치가 아파왔다. 아직 은이 내릴 역은 많이 남았는데 몇 년 만에 신은 구두는 은을 괴롭혔다. 노약자석에 빈 좌석이 보였을 때 은은 자리를 양보한 것을 후회했다.  '발 아프다고 내가 노약자 석에 앉기는 민망하잖아’ 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환승역을 지나자 전철 안의 승객이 확 줄었다. 하지만 자리를 양보한 은은 다시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은의 팔을 당겼다. 키가 훤칠하고 듬직해 뵈는 젊은이였다. 은이 조금만 더 젊었더라도 설렐만한 인물이었다. 은이 미소를 띠고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젊은 남자가 웃으며 은에게 말했다.

  “여기 앉으시라고….”

 청년이 일어서며 자리를 내줬다. 은의 설렘이 녹아내렸다. 알 수 없는 서글픔이 그녀를 강타했다. 찰나의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빠르게 교차했다. 은이 자리 양보를 받아도 어느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상황이 어색했다.  ‘마스크를 써도 나이가 보이는구나.’

은이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서있을 때보다 앉으니 편하고 좋았다.

  은이 전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 개찰구로 나왔다. 지상으로 나가는 출구를 향해 걸어갈 때 계단 출구 맞은편에 있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출구 계단으로 향하던 은 역시 재빨리 엘리베이터 대열에 합류했다. 은이 마지막으로 타고도 엘리베이터의 문은 오랫동안 닫히질 않았다. 은은 자신이 늦게 타는 바람에 엘리베이터가 멈춘 거라는 생각에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문은 미동도 없었다. 은이 닫힘 버튼을 다시 누르려 하자 옆에 선 노인이 말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그거 눌러도 소용없소. 노약자용이라 천천히 움직이고 문도 늦게 닫혀요. 이제  알아두쇼.”

이제 알아두쇼’라고 말하던 노인 목소리가 은의 귓가를 한참 맴돌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