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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Mar 18. 2023

봄바람이 분다

 봄바람 맞은 여자와 남자

 청주행 고속버스에  올라타니 출발 오 분 전인데 창가 좌석이 비어있다는 사실이 우경을 불편하게 했다. 통로 좌석을 선택한 그녀로선 창가 좌석 임자가 타면 귀찮아질 생각을 하며 통로 석에 다리를 한껏 오므리고 앉았다.  움츠린 몸만큼 새로운 강의 자리에 대한 긴장감도 움츠러들기를 바라며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곧 부스럭대며 낑낑거리는 소리에 우경이 눈을 떴다. 비어있던 창가 좌석 임자가 우경이 앉은 통로좌석을 건너가려고 내는 소리였다. 두터운 패딩 점퍼 때문인지 우경이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는 거인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내주려 했지만,  임박한 출발시간에 헐레벌떡 승객들이 연이어 들어왔기 때문에 포기하고,  도로 자리에 앉아 남자가 지나갈 수 있게 가방과 다리를 모아 다시 몸을 한껏 오므렸다. 두툼한 배낭을 창가 좌석에 먼저 안착시킨 남자는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날렵하게 창가 석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놓여있던 배낭을 들고 자리에 앉아서 우경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좁은 데로 들어가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저도 모르게 불쑥 내뱉은 말에 우경은 머쓱했다. 남자가 우경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나도 늙었네' 우경은  넉살 좋게 세상 참견하는 아줌마들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남자는 왼손엔 배낭을 잡고 음료거치대에 들어가지 않는 테이크아웃용 커피 잔을 오른손에 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멍하게 있었다. 긴 겨울 칩거를 끝내고 나선 외출에 우경의 오지랖이 기를 핀 건지 그녀는 말없이 남자의 커피 잔을 뺏어 들고 가방을 가리켰다. 남자는 여자의 호의에 당황한 듯 얼결에 가방을 다리 밑으로 내려놓았다. 우경이 다시 그에게 커피를 건넸다. 남자는 커피를 받아 들고 그녀를 향해 씽긋 웃었다.  우경은 더 이상의 오지랖은 없다는 듯, 혹은 호의를 끼 부리는 저의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표시로 머리를 등받이에 밀착시키며 눈을 감았다.

  고속버스가 청주 IC를 지나 가로수길 막바지에 이르자 도착 안내가 나오기도 전 뒷자리에서 사람들이 우르르는 앞으로 몰려나와 통로에 늘어섰다. 옆자리 남자가 이미 가방을 챙겨 매며 내는 부스럭 대는 소리에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우경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고 머뭇댔다. 비집고 끼어들 억척이 없는 그녀는 사람들이 어서 빠지길 기다렸다. 말미에서야 버스에서 내린 우경이 터미널을 두리번거리며 나왔다. 길에 서서, 휴대폰을 꺼내 학교 위치 검색을 시도하려 할 때 거센 바람이 우경을  때리며 지나갔다. 오래간만에 낀 하드렌즈에 바람이 몰아온 먼지들이 끼어들었는지 눈이 쓰리고 아렸고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쉼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데도 워낙 센 바람을 맞은 탓인지 이물질은 딸려 나오질 않았다. 하필 이렇게 눈에 뵈는 게 없을 때 택시가 앞에 섰고 사람들이 내렸다. 그러나 택시는 떠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일어서 택시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가 서있던 곳은 택시 승강장 아니라 하 차장이었다. 차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 물던 택시 운전기사가 승차장을 가리켰다. '화장이 번졌는지 확인부터 하자.' 우경의 눈에 건너편 택시 승강장에 한쪽 벤치가 보였다. 우경이 승강장으로 건너가려  할 때 신호등도 없는 건널목에서 자주색 차 한 대가 길을 막았다. 젠장, 그녀가 여전히 손수건으로 눈 밑을 닦으며 자주색 승용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빠앙. 자주색 차에서 경적이 울렸다. 흠칫 놀란 우경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물러섰다.  

 “놀라지 마시고 제 차 타세요.”

고속버스 창가좌석에 앉았던 남자였다.  

    

  그 옆 좌석 남자는 버스에서 내려 우경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눈에 들어간 이물질 때문에 꿈지럭 대는 사이 터미널 옆 공용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끌고 나왔다. 그러다 길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우경을 보았다. '왜 저러고 울까.' 우경이 우는 것이 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를 알아본 것일까.' 사실 남자가 오지랖  넓은 여자를 버스 안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몇 번이고 힐끔힐끔 살폈지만 듣는 귀 많은 고속버스 안에서 사생활을 떠벌리고 싶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붙잡고 물어볼까 했지만 머뭇거리는 사이 여자는 사라졌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택시 정류소 쪽으로 차를 몰았다. 필연처럼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울고 있다. ' 혹시 나 때문에...' 어린 시절 살던 동네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의 앞집은 한옥이었다. 2층 그의 방에서 내려다보면 그 여자네 마당과 대청마루가 보였다. 앞집에는 세 모녀가 살았다.  그 보다 두 살 위인 앞집 둘째 딸과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고 길에서 만나면 웃으며 안녕정도는 하고 지나쳤다. 그  '안녕' 소리를 들으려 그는 그녀의 등교시간에 맞추어 집을 나서곤 했다. 간혹 그가 어머니 심부름으로 앞집에 갈 때면 온몸이 꼿꼿해져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이층 그의 방 창을 조금 열고 그녀가 마당에 물을 뿌리거나 한여름 대청마루에 엎드려 책을 읽는 것을 훔쳐보곤 했다. 그런데 앞집 아주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날이 길어지며 앞집 누나를 보기 힘들어질 무렵 그는 군대에 갔다. 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했을 때 앞집 아주머니가 돌아가셨고 한옥에서 어린 여자 혼자 살기가 위험해서 이사 갈듯하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아쉽고 섭섭한 마음에 사귀자고 말해 볼까 고민했다.

  가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밤, 앞집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가 창문을 열고 앞집 대청마루를 내려다보았다. 불빛 없는 불투명 무늬유리문 너머 대청마루에 사람이 지나다니는 것이 보였지만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분명 두 사람을 보았다. 그 밤, 둘째 누나 혼자가 아닌가 보라고 생각한 는 세게 창문을 닫고 씩씩거렸다. 다음날, 늦잠을 잔 가 기지개를 켜며 창문을 열었다. 앞집 누나가 속옷만 입은 채 대청마루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것을 보였고 민망해진 는 얼른 창문을 닫았다. 잠시 후 호기심에 창문을 다시 열어본 누나가 여전히 꼼짝 않고 누워있는 것이 이상했다. 봄바람이 산들산들하지만 쌀쌀한 때였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앞집에 갔다.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여러 차례 두드려도 응답이 없었다. 이층 방에서 그녀를 확인한 그의 어머니가 경찰에 신고를 했다. 신고한 경위를 조사하러 온 경찰들에게 들은 사건 명칭은 강도 살인미수사건이라고 했다. 동네에서는 여자가 강간도 당했을 거라는 소문이 퍼졌다. 동네에서 백수건달 취급받던 남자가 앞집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후 주위를 배회했다는 동네 슈퍼 아줌마의 진술 때문에 범인이 바로 특정됐다.  비명소리를 그렇게 흘리는 게 아니었다고 자책했다. 무슨 일 있어요? 이층에서 한마디 외쳤더라면. 질투와 실망의 망상이 그를 잔인한 방관자로 만들었다.


  그 여자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 그는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지 말자고 생각했다. 바람에 날리며 산발이 된 긴 머리 때문인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덕인지, 여자가 위태로워 보였다.  게다가  여자의 검은 코트 밑자락으로 보이는 다리에 검정 스타킹의 올이 나가 있었다. 남자는 혹시 고속버스 안에서 자신의 가방에 스쳐 올이 나간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그 누나를 닮은 여자를 태워주려 차에서 여자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나 차만 한번 바라다보고는 멀뚱멀뚱 서있는 여자를 향해 경적을 울렸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에 남자는 얼른 차에서 내려 여자에게 뛰어갔다. 여자를 다독거리는 사이 뒤에 들어온 택시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경적을 울렸다.

 “더 있다 괜히 욕먹지 말고 어서 타세요.”     

  남자의 재촉에 우경은 조수석에 덜렁 올라탔다. 그래도 버스에서 나란히 앉았던 시간이 주는 친근감인지 낯선 남자의 호의가 움츠러든 그녀의 기분을 끌어올렸다. '아직 내가 그래도 봐줄 만은 한가 보다. 나도 참 겁도 없어.' 우경은 어차피 자신에게는 뺏어갈 금품도 없고, 늙은 여자 납치 해봐야 팔아먹을 데도 없을 것이고,  다만 몇 천 원이라도 택시비가 굳었다는 생각이  두려움을 이겼다.  

 “저 뒤 차 운전자가 내가 울린 줄 알겠어요. 으허허.”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는 우경에게 남자가 머쓱함을 달래려고 농을 쳤다.

“그러게 왜 사람을 서럽게 해요.”

그의 말을 유쾌하게 받아쳤지만 우경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손으로 더듬더듬 가방 안에서 꽃무늬가  손수건을 찾아 꺼내 들었다.

“왜 자꾸 우세요?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뇨....... 저 히터 바람이 눈으로 몰려들어요.”

추우실까 봐.....”

남자는 히터를 껐다.

“제가 하드렌즈를 착용하는데요.”

“네?”

“난시가 심해서 안과에서 하드렌즈를 착용하래요. 근데 이게 산소투과율은 좋은데 각막 사이로 미세먼지가 잘 들어가요. 그럼 눈이 너무 아파서 사람 환장시켜요. 먼지 많고 바람 많이 불면 아주 어김이 없어요.”

“그럼, 아까 터미널에서도?”

네, 봄바람이 절 자꾸 울리네요..”

는 정면을 바라다보 운전에 집중하려 했다. 이 여자를 어찌할까, 가 자신의 오지랖을 후회할 때 여자가 말했다.

"공덕 쌓았다 생각하세요."

봄바람에 가슴아린 앞집 누나 생각이 날아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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