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광색 전등아래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의 얼굴이 파리하다. 대학병원 암센터의 진료 대기 시간은 환자들의 생명을 길게 늘리려는 듯 더디게 흘렀다. 일찌감치 도착한 지운은 무료하게 진료실 앞 모니터를 연신 힐끔거렸다. 이미 예약시간이 지났지만 그녀의 이름은 진료 대기자 명단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도 보호자 없이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는 지운 하나뿐인 듯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며 지운의 머릿속에 쓸쓸함과 묘한 우월감이 교차했다. '나는 혼자서도 암 관리 잘하고 산다'. 드디어 모니터에 지운의 이름이 올라왔다. 모범환자라는 허세가 간장감에 꺾였다. '암이 더 퍼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진료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그녀를 호명했다.
“이지운 님”
“네.”
“아, 어머니, 지금 진료가 아니고요, 어머니 검사결과 하나가 누락돼서 조금만 더 기다리셔야 될 거 같아요.”
더 기다리란 간호사의 말에 지운은 괜히 어깃장을 놓았다.
“근데 저 누구 어머니 아녜요. 이름 불러주세요 ”
당황하여 낯빛이 벌게진 간호사가 말했다.
“이름 부르면 싫어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간호사가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지운은 머쓱하게 웃어 보였으나 마스크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지운 님, 지금 결과 올라왔어요. 들어오세요.”
문틈으로 둘의 대화를 들었는지 의사가 직접 문 앞까지 나와 지운을 진료실로 불러들였다.
평일 오후 전철 안은 한산했다. 역 안으로 들어오는 열차 안에 빈자리가 듬성듬성 눈에 띄었다. 그러나 행동이 굼뜬 지운은 자리를 확보하지 못했다. 전철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지운은 탔던 문 옆으로 몇 걸음 옮겨 기둥을 잡고 몸의 중심을 잡았다. 빈자리를 두리번거리는 자신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지운은 몹시 피로했다. ‘택시를 탈걸.’ 표적항암제가 효과적으로 암을 제어하고 있다는 의사 말에 안도한 지운은 점점 멀어져 가는 일상을 붙들고 싶었다. 그래서 일상생활로 되돌아온 듯 전철을 탔다. 그러나 비활성화 됐다지만 암은 그녀의 몸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하니 밀려난 정상세포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누군가 지운이 손에 쥔 항암제와 진통제가 가득 든 종이 백을 당겼다. 기둥 옆 가장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였다. 지운은 쇼핑백이 그를 거슬리게 했다고 생각했다.
“미안합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어머니 여기 앉으시라고요.”
“아니, 괜찮아요”
젊은 남자가 무릎에서 백 팩을 들고 일어섰다. ‘어머니’란 호칭에 발끈한 지운이 손사래를 치며 호기를 부렸지만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통로 문을 열고 다른 칸으로 옮겨갔다. ‘하긴 내가 결혼을 했다면 저런 자식이 있을 나이지’, 느긋하게 양보받은 지하철 명당자리에 앉아서 등을 차벽에 기대며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무수한 알림이 도착해 있었지만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향한 메시지는 없었다. 상품 선전, 안전안내 문자들을 삭제하고 지운은 검색 창에 자신의 이름을 입력했다. 이지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적 없는 남자 배우와 여자 아이돌 멤버 사진, 고시 학원의 남자 강사들의 정보가 주르륵 떴다. '세상에 이지운이란 사람이 참 많기도 하다.' 그녀의 어머니가 유명 작명가에게서 출세할 것이라며 받아온 이름이었다. 학교에서 흔하지도 않았고 중성적인 매력이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만족하고 살았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본인인증이 필요한 때면 그녀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안 가는 이름 때문에 전화상으로 지은 혹은 지윤이라고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지우개 할 때 지, 운세 할 때 운"이라고 큰소리로 말하곤 했다.
휴대폰 액정화면 속의 이지운들을 손가락으로 끌어올리던 지운의 손이 멈췄다. “서울 종로구에서 무연고로 사망하신 고 이지운 님 장례일정은...” 비영리 사회복지 단체에서 낸 공고였다. 몸이 쭈뼛해지는 호기심과 공포가 지운을 파고들었다. 그녀가 손가락 터치로 사이트를 열자 합동 장례 안내문 밑으로 무연고로 사망한 고인들의 이름과 사망일, 사망 장소가 도표로 길게 나열돼 있었다. 이지운이라는 이름은 명단 중간쯤에 있었다. 무연고 고인들은 요양원, 병원에서 사망한 경우가 많았지만 50대 이지운이란 남자는 “10월 21일, 사시던 곳에서 사망”이라 입력되어 있었다. '사시던 곳이란 집안이겠지? 주택이나 재택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가 뭐지? 아, 아, 고독사란 말을 피하기 위해서일지도..'
50대 남자 이지운이 죽었다. 그녀는 성별만 바뀌면 자신의 부고가 되어도 어색하지 않은 말에 목덜미가 쭈뼛해졌고 한기를 느꼈다. ‘그는 고독사한 것이다. 10월 21일은 이지운이란 남자가 죽은 채 발견된 날짜 일까, 숨을 거둔 날짜일까. 누가 발견 했을까. 애초에 부인도 자식도 없던 것일까. 있어도 연이 끊겨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던 걸까. 지병이 있어서 죽은 걸은 걸까. 아니면 스스로...’ 그녀의 머릿속에 숱한 질문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의 죽음은 어떻게 알려졌을까?' 여자 이지운에게 공포가 세력을 확장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꾹꾹 눌러 숨기려던 단어가 기어이 튀어나왔다. ‘시취‘. 그 단어가 고독사와 나란히 눈앞에서 맴돌았다. 남자 이지운의 죽음은 생명력을 잃은 육신이 부패하며 풍기는 냄새로 주위에 알려졌는가. 전철 안에서 마스크를 쓴 지운이 숨을 내쉬면 습하고 탁하게 코로 되들아오는 자신의 입냄새가 역겨웠다. 살아 있는 여자 이지운은 산송장처럼 뻣뻣해진 몸을 살리려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을 쉬었다.
“지인 및 친척 등 합동 장례식에 참석을 희망하시는 분은 10월 27일 서울시립 장묘 사업소의...” 과연 합동 장례식에는 그의 죽음을 애통해할 이가 나타났을까?
다음 정차 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지운은 휴대폰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으며 내리기 전 꼭 해야 할 의식처럼 눈을 꼭 감고 애도했다. ‘종로구의 50대 남자 고 이지운 님의 명복을 빕니다.’,
지운은 전철역 출구로 올라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성당을 향했다. ‘무연고자', '사시던 곳', 소위 고독사라 칭하는 모든 요건이 혼자 사는 비혼 암 환자 여자 이 지운을 향해 날아들었다. '나 이지운은 아직 실존한다. 왜 벌써 존재하지 않을 내 죽은 후를 걱정하고 있지? 나는 고독사를 피할 것이고 내가 죽기 전, 이 살벌한 고독사란 단어는 사라지게 할 것이다.' 절실하게 해야 할 일이 떠오른 지운에게 삶의 의지가 강렬하게 일어났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빠른 걸음으로 성당을 향해 걸으며 지운은 오래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읽고 읽던 성경을 다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