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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Oct 09. 2024

기증  설레발

세상은 어리숙하지 않다

 개신교에서 세례를 받은 지운은 늘 천주교 성당을 동경했다. 외향적으로 거룩해 보이는 성례의식과 사제복, 성당 안 스테인드글라스, 마리아 상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리고 테리사, 보나, 미셸, 세례명을 가진 친구들처럼 세례명을 가져보고 싶었다. 그리고 고삼 때 야간자율학습이 없던 날,  대학가라 골목길까지 가득 메운 전경과 연속으로 터지는 최루탄에 우왕좌왕하던 그날, 6.10. 민중항쟁의 날, 결코 열리지 않던 가톨릭 신학교 교문이 열리고 검은 사제복차림의 사제들이 촛불을 들고 혜화동 로터리를 메웠다. “이 땅의 민중들에게 평화를 주시 읍소서.” 그때 무슨 일어나고 있는지 가늠조차 못하던 지운은 젊은 예비사제들의 모습에 홀딱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을 할까 고민을 했지만, 5살부터 다니던 교회에 대한 의리 그리고, 어차피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니 새로 천주교에 입문하는 일은 무척 귀찮고 시간낭비처럼 여겨져 그만두었다. 다니던 장로교회에서 우상숭배라고 이단시했지만 지운이 교회를 잘 안 나가게 되면서 마음이 쓰릴 때 찾는 곳이 성당이었다. 마리아상 앞에 가면 위로가 되었다. 지운의 엉킨 속마음을 풀어 헤쳐 홀가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종교의식 라기보다 눈앞의 형상을 대면하며 자신을 토로하고 자기 충족에 이르는 지운의 마음쉼터처럼 자리 잡았다.

 

  마리아 상 주변에 땅거미가 내려앉자 지운이 신자들처럼 양초를 밝히고 싶어 주변을 둘러볼 때 마리아 상 주변에 줄지어 놓인 가을꽃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교인들이 기증한 것인 듯 세례명이 적힌 메모 카드들이 꽂혀있었다. 신자들이 하는 기도가 궁금해진 지운은 살짝 메모카드를 집었다.

“아버지의 간이식 수술을 무사히 마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 주셔서 감사하다는 글일세.’ 기복신앙으로 종교가 전락했다며 교회에 발길을 끊은 지운은 냉소적으로 자문했다. ‘신이 간을 내어준 것도 아니고 수술을 집도한 것도 아니고,  간 이식 수술  성공에 신이 과연 관여를 했나?’ 지운에게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구심이 몰아쳤다. 그러나 다시 마리아 상에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신의 행태를 되짚었다.  ‘남의 감사함을 헤집은 저의 건방진 생각을 용서하소서. 누구나 죽지만 좀 더 가까이 다가온 죽음 앞에 저는 산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육신을 떠난 영혼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지운 역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갈구했다. ‘주여, 도와주소서.’

 퍼뜩, 그녀의 머릿속에 한 생각이 지나갔다. 간이식, 이식, 그러려면 누군가의 장기기증이 있었다. ‘어쩌면 세상에 육신을 내어주고 심지어는 고결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지운의 몸에 삶의 열기가 훅 올라왔다. 지운의 암과 약물로 망가진 장기들은 누군가에 절대 이식할 수 없지만, 그러나 몸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 몸을 기증하면 된다. 암환자의 몸도 좋은 자료가 되지 않을까? 지운은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천방법을 알아내자.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집에 가까워질수록 지운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신기증은 그녀에게 해결책이라기보다 생명력을 잃은 육신의 처리를 위한 꼼수라고 생각해 마음이 개운하지 못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미물로 취급하는 행위는 아닐까? 인간의 삶의 의미를 묻고 또 물었다.  버전이 낮은 컴퓨터가 부팅되는 시간 동안 지운이 기도 했다. ‘당신이 '보기 좋았다' 하신 아름다운 피조물로 살게 제게 용기와 실천력을 허락하소서!’


  인터넷 창이 열렸고 지운은 검색 창에 ‘시신기증’이라 쳤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검색 결과를 아무리 살펴도 시신기증을 보건복지부나 정부주관으로 포괄적으로 담당하는 기증센터를 찾을 수 없었다. 각 대학병원별로 시신기증 안내만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연관 검색어로 ‘시신기증을 하면 안 되는 이유’에 이어 ‘시신기증운동 종료’란 표제어가 떴다. 지운은 ‘종료’라는 단어를 클릭했다. 그러자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가 화면 상위에 떴다. ‘그래, 시신 기증도 장기기증이지.’ 그러나 그녀가 본부 홈페이지의 이곳저곳 클릭질 해도 어디에도 시신기증을 신청할 곳은 없었다. 센터 내에서 시신기증이라고 검색을 하자 비로소 시신기증 접수가 수년 전 이미 종료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지운은 ‘기증종료’와 함께 링크된 신문기사를 클릭했다. 시신기증자가 차고 넘쳐 시신보관이 불가능해져 시신기증운동을 종료했다는 기사였고 몇 년 전부터 시신기증은 각 대학 병원별로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마저도 의대규모에 따라 받지 않는 곳도 상당수였다.


 좌절, 지운을 설레발을 치게 만든 머릿속 생각에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여전히 미련이 그녀를 붙들었다. 지운은 다시 검색 창을 클릭했다. 각 대학병원의 시신기증절차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거의 모든 대학병원에서 ‘시신기증이란’ 이란 정의 내리기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어떤 대학들은 각기 다른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요지는 같았다. 시신기증이란 ‘아무런 조건 없이 의과 대학에 해부와 연구를 위해 자신의 몸을 기증하는 일’이며, 사망자가 전염병이 없는 경우에만 가능하며, 사망자의 생전 본인 뜻과 가족의 뜻이 일치하여야 하며, 사망 시 24시간 이내 반드사 유가족의 사망 사실 통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아, 유가족.”

가족이 없어 시신기증을 해결책으로 생각한 지운의 기대가 ‘유가족’이란 단어에 혀를 찼다. 유가족 없는 지운에게는 불가능했다.  지운은 자신의 해결책은 설레발이었다고 하는 안도감과 무기력이 동시에 몰려왔다. 하지만 지운은 그저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운이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대학병원으로 전화문의를 해볼까?’ 오후 여섯 시가 가까웠고 그새 어둠이 짙어졌다. 직장인들도 퇴근할 시간이다. 지운은 가상의 공포에서 스스로를 풀어주었다. ‘오늘 살아있는 나의 이성과 감정을 더 이상 허비하지 말자. 단지 제때 알려지기만 하면 되는데’ 결국 시신을 처리해 줄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것은 헛짓이었다.  죽음만 바로 알려지면 사후문제 절차는 여러 방법이 있는데 자신이 엉뚱한 설레발을 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의 부고를 바로 알리도록 미리 조작해 놓는 기계를 발명해 볼까’.   

 병원에서 검사와 기다림, 고독사와 시신기증에 대한 치열한 생각에 지운의 에너지가 모두 소진됐다. 지운은 침대에 누웠다.  

    

  빠이 삐리리 삐리리, 알람이 울린다.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몸이 천근이요 만근처럼 무거웠다.

‘소리가 너무 요란하다. 나는 오늘도  살아있다. 그런데 알람을 꺼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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