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창골 샌님 Sep 29. 2024

철없는 여자

아토피의  계절

  여자는 거울 앞에서 모자를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며 적절한 위치를 잡았다.  항앙치료 후 가릴 곳이 많아진 여자는 외출준비에 더 공을 들였다. 보통은 호르몬 억제 치료로 중성화되며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하며 여성스러움과 얼굴에 생기를 주려하곤 했지만 오늘은 머리와 얼굴을 모두 가려야 했다. 이마에 허옇게 들고일어난 각질에, 시뻘겋게 우둘투둘해진 볼에 듬성듬성 딱지까진 얼굴은 생선비늘을 한 편으로 쓸어놓은 몰골이었다. 이렇게 얼굴에 아토피가 기승을 부릴 때는 모자가 안성맞춤이었다.  수십 년째 싸워온 아토피 습진에 이골이 난 여자는 얼굴에 마법을 걸 듯 혼잣말을 되뇌었다.

“스테로이드 한방이면 다 괜찮아질 거야.”

 여자는 스테로이드를 처방받으면 바로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를 되찾을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집 밖으로  나선 여자는 태양이 작렬하는 여름이면 으레 이삼일에 한 번씩 피부과를 가던 과거의 일상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나, 모자가 멋있어요. 정말 잘 어울려요.” 아파트 출입문에서 마주친 청소 아주머니의 말에 여자는 근육이 빠진 다리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걸음을 내딛었다.     

 

한여름 뜨거운 뙤약볕 때문인지, 오후 진료 초반이라 그런지 피부과는 한산했다. 식곤증에 남자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감당하려 애를 쓰고 있을 때 간호사가 진료실 문을 노크와 동시에  열었다. “원장님, 환자분 들어오세요.” 왕골 페도라를 뒤로 비스듬히 치켜 쓰고 분홍 마스크를 쓴 여자가 진료실로 들어섰다. 두 눈 빼고 다 가려진 얼굴을 앞으로 쭉 빼며 “안녕하세요”라고 경쾌하게 인사하는 여자의 눈이 유난히 커 보였다. 나른하게 늘어졌던 남자는 데굴데굴 굴러 떨어질 거 같은 눈알을 받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두 손을 내밀며 여자에게 진료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러고는  밀려드는 쑥스러움에 모니터의 환자기록을 샅샅이 살폈다. 그는 차트에 적힌 여자의 성년월일을 소리내어 읊으며 확인했다. “네.”  여자는 초진 때도 안 묻던 생년월일 확인이 의아했다. ‘혹시 내가 나이와 달리 어려 보이나’     

“지난번 약은 어땠나요?”

“가려움증은 없어졌는데 지난번 처방 해주신 알레그라만 가지고는 안될 것 같아요. 얼굴이 더 안 좋아졌어요.”

여자가 모자를 뒤로 젖히자 각질이 우스스 검은 주름치마 위에 허옇게 떨어졌다. 남자는 여자의 모자 속에 감춰져 있던 맨질맨질 훤한 헤어라인에 솜털 같은 머리카락이 가늘게 몇 가닥 붙어 있음을 보았다.  

“혈액 종양내과 선생님께서 피부과 약을 암제와 함께 먹어도 무방하다고 하셨어요. 지금 먹는 항히스타민제에 스테로이드가 포함되어도 괜찮지 않아요?”

여자의 눈빛이 스테로이드제를 간절히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의 친절을 기만하는 만성 아토피 암 환자의 아는 체에 얼굴이 무표정하게 굳었다. 그는 말없이 지난번 처방을 살펴보았다.  

”우선 약은 바꿔 드릴 테니 드셔보세요, 원하는 처방은 안 돼요. 항암 치료받는 병원에서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가아요. “

여자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했다.

“아이, 선생님 지금 너무 가렵고 따갑고 괴로운데..... 그리고 이 얼굴로 다니기 힘들어요” 남자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여자가 애원하듯 말했다.

“시간차를 두고 복용하면 정말 다 괜찮다고 했는데..... 그럼 연고라도 바꿔주시면.....”

여자의 목소리가 가늘게 진동했다.

남자는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여자에게 말했다.

“알다시피 여기선 처방에 한계가 있어요. 삼일 치 처방할 테니 금요일에 다시 오세요.” 그는 자신이 너무 쌀쌀맞게 말한 건 아닌가 싶어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저는 이게 최선입니다.”

“……. 네.” 대답과 동시에 일어서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유난히 가녀려 보였다.


진료실을 나서는 여자의 코끝이 시큰해지고 마스크를 통과하지 못하고 고인 뜨거운 숨이 여자의 얼굴을 더욱 달궜다.

 “스테로이드 한방이면 다 해결될 텐데.’”

 이제는 건조한 찬바람 부는 겨울뿐 아니라 여름까지 철없이 행패를 부리는 아토피에 장기간 대항하던 자신만만했던 경험과 노하우가 물거품이 되자 서글픔이 여자를 휘감았다. 그녀를 향해 접수대에서 백옥처럼 반질반질한 피부의 간호사가 말했다.

“레이저 실로 가셔서  치료 준비하세요. 원장님께서 가실 거예요.”

여자는 뜨악하며 자신에게 반문했다. ‘이젠 사람 말귀도 못 알아듣게 됐나. 그런 말 없었는데.’

 여자는 레이저실 침상에 올라앉아 간호사가 건네준 보호 로션을 환부에 도포했다. ‘자신이 암환자에게 너무 매정하게 굴었다 생각해서 치료를 추가한 게 틀림없어.’ 의사가 들어와 레이저 기계를 켜고 그녀의 환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에구,  집에서 로션 듬뿍 바르고 보습에 신경 많이 쓰세요 아토피 치료는 보습이 최고예요. 카운터에 있는 수딩로션이 좋으니 써보세요.”      

여자는 스테로이드 대신 로션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명이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