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주변을 서성대는 그대를 보고 이제는 딱 잘라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계획은 내가 자유롭게 움직일 때 내 구슬땀을 꿰어 준비한 예물을 들고 당신과 대면하려 했지요. 그런데 당신은 우유부단하기도 하고, 느닷없이 충동적으로 일처리를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나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알려야 하고, 당신의 충동도 다독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처음 내가 당신을 만난 때는 내가 한창 싱그럽던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그때의 젊은 나는 당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죠. 아마 안중에도 없었을 거예요. 게다가 당신은 내 어머니의 등쌀에 풀이 죽어 내 가까이 다가올 엄두도 못 냈을 게예요. 그때 당신을 무척 원망했습니다. 어떻게 옆집 남자의 농간과 잔인함을 수수방관하고 있었는지, 옆집남자와 결투라도 벌여 데려가 처단해야지 엉뚱하게 내 주변만 맴돕니까? 강간 살인미수범이 아닌 나를 따라다니다니요. 그래도 내가 그때 당신을 따라갈까 고민했던 이유는 가족이란 보호막도 없는 내게 동정을 가장한 주변어른이란 사람들의 비난을 맞이했을 때였습니다. 이십 대 초반의 세상물정 모르고, 주는 사랑보다 받는 사랑에 익숙하게 살던 나는 집에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살면 사회모범생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 만만했었지요. 그런 나를 시기 어린 눈으로 건방지고 만만하게 보고 만신창이로 만들 속셈으로 노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요. 그런데 세상은 온몸이 얻어터지고 불구가 된 나를 위로하는 척 비웃었지요. 왜 미리 대비를 안 했냐, 혹여 인사한답시고 웃음 흘리고 다니지 않았냐는 둥, 기가 찬 말이 들릴 때 나는 당신을 찾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몸을 혼자서 가누지도 못해서 그때 당신을 만나러 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신체장애를 관리할 수 있게 되면서, 미래를 위해 학교를 다니고, 해외에도 나가 보니 세상에는 흥미진진하고 시도해보고 싶은, 호기심을 끄는 것이 많았어요. 물론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보기도 하고, 하지만 알죠? 내가 바람기 다분한 여자 아니란 거, 내게 진심이 느껴진 청혼을 한 사람도 없었지만 나 역시 진지하게 결혼을 고민한 남자는 없었다는 거, 나는 관심을 받고 싶었고 남들에게 내 남자친구라고 으스댈 만한, 나를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바랐으니, 제대로 연애한번 못해봤죠. 그래도 돌이켜보니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당시엔 당신이 내 안중에 들어올 리 없었죠.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서며 내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고생시키던 언니에게서 독립해 겨우 혼자 힘으로 입에 풀칠할 수 있게 되었죠. 내가 장애자란 것도 망각하며 세상에 나섰지요. 하지만 장애인으로 늦은 나이에 꿈을 좇다 보니 뱁새가 황새 따라가듯 너무 벅찼어요. 그래도 초반엔 희망적이었어요. 하지만 비장애인과 경쟁해야 하니 나도 말도 행동도 서툴고 느린 내가 답답했는데 남들은 어땠겠어요? 살아남으려 핑계가 늘어가지만 돈 벌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죠. 벌이가 시원찮으니 생활비가 바닥나는 상황이 반복됐어요. 살아남으려 여기저기서 오장육부 다 내놓으며 돈을 빌렸죠. 벌면 갚는다고 했지만 그 벌 때가 일정하질 않으니 제때 돈을 못 갚았죠. 신용도 친구도 잃어갔어요. 무엇이건 가능한 일이면 닥치는 대로 하려 했는데, 학력이 높아서 부담스럽다거나 - 직업을 구하려고 공부한 건데 참 허탈 했어요- 나이가 많아서, 심지어 어떤 곳은 국가에서 주는 장애인 고용지원금 받으려고 나를 고용하고 지원금 받는 순간 해고 했죠. 막일이라도 해, 네가 일을 가리니까 그렇지, 어디 가서 설거지라 하면 풀칠은 하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이 제일 기가 막혔지요. 마비된 손을 보고도 그러니. 그때 정말 당신이 날 찾아와 주길 간절히 기다렸답니다. 사실 내가 한강으로 호수 공원으로, 한밤중 건물 옥상에도 올라가 보고 당신을 정처 없이 찾아 헤맨 날들이 있었던 걸 아시나요? 그런데 내가 찾을 때는 당신의 차고 냉랭한 그림자도 안보이더군요. 아마 당신은 내가 곧 좋은 날을 맞을 거란 걸 알았나 봐요.
겨우 장애자란 것 상관없이 오히려 편의 봐주는 지방 국립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장애연금도 받게 되고 밀린 월세, 의료보험료도 청산하고 살만한 시절이 찾아왔어요. 그때 느꼈지요. 세상의 소수 약자들에게 국가가 필요한 이유를. 그때쯤 당신이 내 주변을 서성이는 걸 보았죠. 어떤 때는 나를 휙휙 스쳐 지나는 당신이 느껴져 눈에 띄면 쫓아가서 뒤통수를 세게 후려 쳐 버리려고 했는데, 암 수술이 끝나고 바로 항암 치료를 하니 당신을 놓쳐버렸죠. 아마 독하게 투하되던 항암제에 당신도 힘을 잃고 자취를 감춘 거겠지요. 이제는 나도 기가 세진 건지, 힘든 수술과 항암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당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어요.
한 겨울 거센 눈보라와 추위에 얼어붙어도 봄바람에 생명이 소생하는 걸 보세요. 나의 생명력도 자연에 못지않아요. 당신의 그림자만 봐도 숨었던 나는 이제 당신을 찬찬히 살펴보려 해요. 이제야 관심이 가네요. 그러니 스토커처럼 두렵게 내 주위를 배회하지 말아 주세요. 내게 당신을 좀 더 받아들일 시간을 주세요. 실존이 사라지면 공허라고 아무것도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 없다지만 소설이 전개되고 절정을 맞고 마무리로 가듯 내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을 주세요. 어쩌면 쉬엄쉬엄 진행할 테니 오래 걸릴지 몰라요.
다시 나를 찾아올 때는 멀리서부터 눈에 띄게 윤이 반질반질나는 세단 정도는 몰고 오세요. 멋지게 따라갈 테니 당신도 멋진 양복으로, 브리오니 슈트로 입어보세요. 대신 나도 그에 걸맞게 차려입을 시간을 주시고요. 내가 바로 못 나갈 수 있으니 나를 기다리며 그리고 함께 들을 음악도 준비하시고요. 기왕이면 쇼스타코비치의 세컨드 왈츠로 준비해 주세요. 명품을 휘두르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기려 보는 것도 포스트모던 하잖아요. 내 운명에는 투쟁이라는 이름의 딱지가 붙어 있고 당분간은 여전히 투쟁해야 할거 같아요.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의 함성 속에 떠나고 싶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