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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들고 떠납니다 D-11

손주에게 구름소원

by 나철여

뭔가 날짜를 정해놓고 설레는 건 일상을 더 빛나게 한다.


여행날짜가 다가올수록 걱정하는 손주 녀석이 있다.


"할머니 여행 가신다는 거 몰랐어요, 어제 엄마 아빠랑 말하는 것 들었어요"


"민준아, 우리 할머니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초2 기준이

https://brunch.co.kr/@58ab10bb53d9448/194

가 다섯 살 동생 민준이에게 하는 말은, 그동안 주 중 할미육아로 살짝 힘들었던 피로를 단번에 녹아내리게 했다.


브런치에 디데이를 잡고부터 캐리어에 짐 싸기 주방정리하기 안방욕실 바닥 깔기는 일상에서 신경 쓰지 않던 일이다.


책장정리도 그랬다.

손바닥만 한 미니 책 [햄릿의 데미안]을 찾다가 책꽂이 한쪽에 자리 잡은 며느리가 만든 육아책이 보였다.

내가 딸보다 며느리를 더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둘째를 낳고 육아휴직 중 맘스다이어리를 조용히 책으로 엮어냈다.

자랑은커녕 전혀 몰랐다. 어느 날 손주들 방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했다. 한 장 한 장 스토리와 사진들로 소담스럽게 엮인 책이다. 3년 전이니까 기준이가 여섯 살 민준이는 두 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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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도 출간작가?

맘스다이어리 출판은 100일 연속 일기 작성 시 무료 쿠폰을 발급받아 진행할 수 있고, PC를 통해 홈페이지에서 편집 및 출판이 가능 ...

백일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과 사진을 보내면 무료로 책발간을 해준다는 웹이 있어서 그냥 하게 되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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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22년 1월 9일

귀여워.

소랑에 있다 집에 돌아오니 민준이가 울 일이 많아졌다.

(...)

거제 소랑리는 며느리의 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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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아가 뿔났다. 22년 1월 10 일.

당연한 거겠지만 민준이는 자기 장난감보다 형아 장난감 냠냠을 더 좋아한다.

(...)


며느리 책자랑 많이 하면 누가 훔쳐갈까 봐 요기까지




며느리 자랑 손주들 자랑은 수두룩한데, 남편은 흉볼게 끝이 없다. 무엇보다 잔손이 많이 간다. 먹은 자리도 그렇고 씻은 자리도 그렇게 뭘 흘려놓는다.


나 없는 동안 욕실에서 미끄러질까 봐 끄럼방지 매트를 새로 깔았다.

나 없는 동안 주방사용에 불필요한 믹서기 냄비등을 치우고 큰 식탁 위에 차례대로 토스트기 전기포트 간식바구니로 미니멀하게 세팅한다.


집안이 매일 조금씩 훤해지는 건 그동안 불필요했던걸 치우지 않은 탓도 있지만 버리지 못한 습관도 있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이사는 적어도 5년마다,

여행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은 가야 한다고.

그래야 버릴 건 버리고 정리정돈이 된다는 생각이다.


가까이 사는 아들네가 비상시 대비일 뿐, 나 없는 동안 잔소리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고 싶은 남편은 나 대신 아들 며느리가 드나들며 잔소리할까 봐 미리 손사래를 친다.

하루 루틴이 정해져 있는 남편은 환자라는 명패를 달고부터 더 철두철미하다.

아침산책, 성경통독, 넷플릭스 영화 섭렵, 골프와 바둑 TV채널 고정까지 하루가 짧단다. 물론 핸드폰도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주식이며 유튜브쇼트에 누구보다 손 빠르다.

절제하라는 나의 잔소리에 변명 같은 이유를 댄다.

치매예방에 좋고 항암 약부작용인 손발 저림에 돈 안 드는 약이란다.


여행 가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철부지 남편,

일찍 철들어버린 나 철여.

둘은 나름의 방식으로 숨 쉴 구멍만 찾는다.

손주에게 할미의 구름소원을 귓속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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