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터, 꺼지다

by lightjc

11.15.(월). 09:05

출근이 조금 늦었다. 오전 주간회의, 테이블 끝에 앉았다. 자료가 없어 누구 걸 복사할까 생각하다가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근데 이건 누가 만들었지?


11.16.(화) 12:25

다들 밥 먹으러 갔다. 김미진 대리는 벌써 다 먹었는지 자리에 왔다가 가방에서 지갑만 꺼내 들고 다시 나간다.


11.17.(수). 15:00

책상 전화기 너머 작은 어항. 구피 한 마리가 둥둥 떠 다닌다. 119에 전화라도 해 볼까. 어떻게 누르는 거였지? 사외니까 9자 누르고 119인가. 비상전화니까 그냥 119만 누르면 되는 거였나.


11.18.(목) 17:50

담배 하나 피우고 돌아왔다. 습관처럼 회사 이메일을 확인한다. 가방을 챙겨 들고나간다. 엘리베이터가 한산해서 바로 내려올 수 있었다.


11.19.(금) 10:30.

“저기, 라이터 좀……”

멍하니 앉아있는 성과장에게 엄과장이 조용히 다가가며 말한다.

“네?”

“어, 어, 그래….”

성과장이 얼른 주머니를 뒤지며 라이터를 건네준다. 역시, 친구밖에 없다. 성과장은 같이 바람이라도 쐴 생각에 일어나며 말한다.

“담배는 있……”

엄과장은 벌써 저 멀리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의 걸음이 그렇게 빠른지 몰랐다. ‘라이터 좀……’ 오늘 그가 처음 들어본 말이다. 이번 주인가?

담배나 피우러 갈까? 1층으로 갈까? 라이터가 없어서 그만두었다.


10:50.

잠시 화장실 다녀왔다. 책상에 라이터가 놓여 있다.


16:00

‘성 과장님, 잠시 좀 뵐 수 있을까요’

감사팀장의 메시지. 감사실 옆 회의실에서 마주 앉았다. 조사만 해봤지 조사대상이 된 건 처음이었다. 올해는 정말,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해 본다.


“한 일주일 지난 것 같은데 생각 좀 해 보셨는지……”

“무슨 생각 말입니까”

“잘 아시면서 왜 그래요. 절차 들어가면 사람들 말만 많아지잖아요. 보고서 쓰다 보면 서로 얼굴 붉어지는 일들만 생기는 거고……”


“뭐, 사장이 찍으면 그냥 찍혀서 넘어가 줘야 합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뭔데요”

“다른 사람들이 어디 있는데, 다 나갔잖아. 아무도 없네.”

“그럼 김세전 부장은 뭔데요”

“아, 내가 약속을 깜빡했네. 먼저 좀 일어날게요”



성과장이 감사팀장을 따라 나가려는데 송기후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좀 앉으시죠”

송기후가 성과장의 어깨를 밀어 앉히며 말한다.


그가 종이 하나를 내려놓는다. 성과장이 클릭했던 이카루스 용역 건 결재서류다. “김세전”이라는 이름은 없다.

분명히 자기가 클릭할 때만 해도 김세전 부장이 중간결재자에 있었다. “확인”표시만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최종 결재서류엔 사장과 최상견 외에 김세전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게 뭡니까?”

“2억이라는 돈이 증발됐어요. 과장님이랑 내 연봉 합쳐도 그 반도 못 되는 큰돈이 날라갔다고요. 근데 이카루스 팀원들 다 나갔잖아요. 문제가 생겼으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죠. 그렇죠?”


성과장은 종이를 들고 일어났다. 바로 사장실로 간다.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가서 사장에게 결재서류를 들이밀며 말한다.

“김세전이가 왜 빠졌는지 알려주시죠. 그리고 참조 란에 클릭한 사람이 징계면, 사장님은 뭡니까. 이거, 사장님이 하나하나 다 지시해 가면서 진행된 거 아닙니까”


감사팀장과 송기후가 뒤따라 뛰어 들어온다. 지나가던 직원들 몇 명이 사장실 앞에 서 있다.


“17년 동안 개고생했는데, 법무도 하라고 해서 계약서 검토고, 업체협상이고 전부 참여했는데, 시키는 거 다 했잖아요. 경영지원팀으로 와서 감사팀 업무까지 같이하고, 김 부장 일까지 다 하고, 송기후 빠져서 막내 일까지 하고……근데 왜 갑자기 그러십니까? 회사도 많이 커졌는데 내가 뭘 잘못했다는 겁니까.”


의자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서던 사장은 감사팀장과 송기후가 성과장 앞에 서자 그대로 앉는다. 잠시 성과장을 노려보다가 웃으며 말한다.


“성과장, 코로나 당신이 수입했나?”


성과장이 결재서류를 구겨 사장에게 던진다. 송기후가 뒤에서 성과장의 배를 안고 질질 끌면서 사장실 밖으로 나온다.


“뭐 하는 거야 추잡스럽게”

송기후가 성과장을 한쪽으로 밀쳐내며 말한다. 성과장이 책상에 부딪힌 뒤 넘어질 뻔하다 가까스로 일어난다.


“나잇살 먹고 잘못했으면 곱게 물러설 줄 알아야지”

“이 자식이”

성과장이 송기후의 멱살을 잡으려 하자 송기후가 양 팔로 그의 어깨를 밀치며 말한다.

“뭐, 뭐 어쩌려고. 성씨, 어?”


퍽!


송기후가 주저앉는다. 왼쪽 뺨에 손바닥만 한 자국이 시뻘겋다. 그 소리에 사장도 놀라 뛰어나온다. 엄과장이 송기후의 멱살을 잡고 들어 세우더니 책상 쪽으로 밀어붙인다. 다시 다가서는 엄과장. 이번엔 책상 위 서류며 컵이며 전부 다 사장 쪽으로 밀어버린다. 말없이 사장에게 다가가는데 성과장이 막아서며 말한다.


“잘못했습니다. 그냥 내가 나갈게요. 그러면 되잖아요”


사장과 송기후와 감사팀장… 사람들을 돌아가며 노려보던 엄과장은 책상을 발로 차 버리고는 뒤돌아 나간다.



11.30. 승진발표일.

며칠 동안 송기후와 감사팀장, 김세전 부장이 사장실을 몇 번 들락날락거렸다. 그리고 오늘, 성인태와 엄태정은 의원면직에 서명했다. 그리고 합의서 한 건씩을 따로 작성했다.


“사내에서 발생한 직원 간의 불미스러운 마찰에 대하여, 관련 당사자(성인태, 엄태정, 송기후)는 원만히 화해하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향후 어떠한 민·형사상의 책임도 서로에게 묻지 않을 것을 합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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