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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내미 이 복 희 Nov 22. 2023

다시, 신혼

다시, 신혼 




이 복 희 


 


결혼 삼십 년 차인 우리 부부를 두고 신혼이란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맏딸은 출가를 했고 작은딸과 아들은 제각기 삶을 일궈가는 중이다. 이렇게 세 아이 모두 우리들 곁을 떠나고, 북적거렸던 집안에 단출하게 둘이서 살고 있다. 이런 우리 부부를 두고 남들이 듣기 좋은 소리로 한 말이다. 신혼엔 깨가 서 말 쏟아진다고 했던가. 나이 들어 다시 맞는 신혼은 무덤덤한 맹물 같거나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다.  


  깨가 쏟아지는 신혼이 언제였더라, 있기나 했나 싶을 정도로 까마득하다. 결혼 삼십 년이란 세월에 감정도 무뎌지는지 매사에 시큰둥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편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냥저냥 흘러가는 일상이다 요즘은 웬만해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없다. 박장대소로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어본 지 까마득하다. 사소한 일에도 감탄사를 연발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그동안 이성적인 판단으로 급급하게 살아오느라 감성적인 면을 사치라고 억누르며 살아온 게 분명하다. 서로가 새삼 감성의 싹을 틔워보려고 하지만, 큰 돌덩이로 눌러놓은 듯 감성의 발아는 더디기만 하다. 어쩌다가 모래 바람만 서걱대는 건조한 부부가 돼버렸다.  


  결혼 생활 내내 우리 부부는 서로를 챙기고 바라보는 것에 차선이었다. 어느 가정이나 비슷하겠지만 곁에 있는 배우자보다 부모형제나 가족이 먼저였고, 자식들을 건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그렇게 서로에게 외면 아닌 외면으로 살아오다가 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부부로 산 세월이 어딘데 서로가 상대를 너무나 잘 알고, 당연히 상대를 위하며 살아왔다고 여겼다. 우리 부부의 맹신이 ‘나만 한 남편이, 나 같은 아내는 없다.’고 서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과신 효과(overconfidence effect)” 또는 “과신 오류”의 예가 아닐까. 진정으로 상대를 위하는 것은 나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기준에서 배려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아이들이 없다고 해서 둘이서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진 게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생활공간과 시간을 갖으려고 했다. 남편은 남편대로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고, 나는 나대로의 시간만 할애하며 살고 있다. 각자의 생활에 참견하는 날엔 사생활 침해라도 당한 듯 괜한 트집을 잡았다. 그러다가도 상대가 하는 일에 서로 관심을 두지 않으면 못내 서운해했다. 급기야 각자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남편은 퇴근 후 TV 채널을 돌려가며 프로그램 낚시를 하고, 나는 내 방에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쓴다고 긁적이는 시간을 갖는다. 어느 날부터 잠자리도 각자 방에서 따로 잔다. 그렇다고 부부 전선에 이상이 있어서도 아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잠자리에 대해서 그렇게 연연하지 않는다. 따로 잠잘 버릇을 들이니 좋은 점이 많다. 진짜 신혼이라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늙은 신혼은 예외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서로 맞출 필요도 없다. 각자 자기가 자고 싶은 시간에 먼저 잔다하고 잠들면 된다. 한 사람은 잠들었는데 뒤늦게 들어가서 잠든 사람 깨워 잔소리 들을 이유도 없다. 나는 요즘 갱년기증세로 불면의 나날이다. 밤새 뒤척이고 화장실 들락거리고, 그래도 잠이 오지 않으면 거실에 나와서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도 있다. 각방에서 자니 남편의 잠을 방해할 우려도 없다. 남편도 숙면을 취할 수 있고. 나도 억지로 자려고 애쓰면서 힘들어하지 않아도 된다. 읽고 싶은 책도 읽고, 지나간 영화를 볼 때도 있다. 아니면 식탁 전등불 아래서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홀짝거리는 낭만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정색을 한다. 엄마 아빠가 한방을 쓰지 않는 것이 큰일 난 것처럼.  


  “너희들도 나이 들어 봐라, 따로 자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자유로운지.” 


  이렇게 말을 해주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다. 결혼 초에 집안 어른들께서 아무리 싸우더라도 각 방은 쓰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나이 때의 부부들 중, 열에 여덟아홉은 각 방을 사용한다. 아니면 한방에 자더라도 침대를 따로 마련해서 잔다는 사람도 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한방을 고수하며 잠자리를 함께하는 그야말로 드문 잉꼬부부도 있다.  


  다시 시작된 신혼을 잘 보내야만 노후까지 평탄한 삶을 살아갈 것인데 어떻게 하면 이 시기를 잘 극복할 것인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부가 함께 하는 취미를 가지라고 선배들이 조언을 했다. 하지만 외향적인 나와 내향적인 남편과는 성향이 다르다. 남편은 집에 꿀단지라도, 아니 금덩어리라도 숨겨두었는지 늘 집에 틀어박혀 있기를 좋아한다. 방랑벽이 있는 나는 하루만 집안에 있어도 그야말로 환자가 된다. 사람을 만나야 하고 들로 산으로 강으로 바람을 맞으며 다녀야 생기가 돈다. 친구들이나 문우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소통이 되는 반면, 남편과는 이상하게도 대화에 옹벽이 있다. 서로 자신만의 주장을 내세우고 굽힐 줄 모르는 옹고집 때문인가. 우리 부부 사이가 성숙되려면 더 많이 곰삭아야 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쉰 중반을 넘어선 우리 부부에게 너무 이른 타협은 어쩌면 더 큰 분란만 일으킬 수도 있겠다. 


  남편과의 함께하는 것에 왜 다들 불편하다고 하소연할까. 우리 부부만 그런 줄 알았다. 밖에 나가서 친구나 언니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다들 나이가 들수록 남편을 남의 편이라고 한다. 오육십 대의 여성들이 집안 살림에서 벗어나 독립을 할 시기다. 이 시기가 되면 서서히 반항의 길로 들어선다. 제2의 사춘기라고 해야 하나. 여성 호르몬도 줄어들어 남성적 성향도 짙어진다. 어쩌면 가족들 때문에 숨죽여 살아온 날들에 대한 보상 심리도 들어 있으리라. 나도 갱년기에 접어들고부터 남편과 대화 중 울가망한 기분이면 나도 모르게 “욱”하며 언성을 높이게 된다. 삼강오륜 중에 부부유별이라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의 구별이 있다고 했다. 문제는 부부라는 맹신 아래 무조건 내 편이라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에서 시작된다. 시쳇말로 부부 사이에도 미적 거리가 필요하다. 


  여고동창 S 부부는 어디에 가나 늘 함께 다닌다. 그 친구는 어느 누구보다 남편하고 다니는 것이 좋다고 한다. 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남편과 함께 다는 것보다 혼자인 것이 좋다고 하니 친구는 의아해하는 눈치다. 친구 부부는 둘이서 여행을 자주 한다.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것도 좋아하고, 음악 취향도 비슷하고, 등산도 함께 즐긴다. 처음부터 두 부부의 성향이 딱 맞아떨어졌겠는가. 아마도 어긋나기도 다툼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서로 양보하고 조율해 왔으리라. 친구네는 여행을 갔을 때 집안 이야기나 아이들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부가 서로 좋아하는 공동 화재를 두고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했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자존심을 건드리는 대화는 피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대화를 하다 보면 데퉁스럽게 대꾸를 하는 바람에 늘 삐걱거린다. 그럴 때마다 조율이 아니라 어긋나 부분에서 아예 더 이상의 대화나 묘책을 세우지 않아 왔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조율해야 하는 과정이 힘들다고 회피해 온 우리 부부의 잘못이 크다.  


  부부만 남게 된다는 것을 생각지도 않고 살아왔다. 어느 듯 세월이 흘러 우리 부부도 단둘이 남게 되었다. 신혼 때처럼 아등바등 서로에게 친밀감을 가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남편은 내 앞에 있고 나도 남편 곁에 있다. 연로하신 노부부를 보면 있는 듯 없는 듯 소통하는 것을 보면 신통하다. 상대의 눈짓, 행동만 보면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머잖아 우리 부부도 서로의 눈빛 하나로 무엇을 원하는지 가늠할 때가 오지 않을까.  


  지금 우리 부부는 “다시, 신혼”을 위해 살아가는 법을 조율 중이다. 좀 더 시간이 흘러 지금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그때는 어느 노랫말처럼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시간이 올 것이다. 그날까지 언제나 다시, 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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