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으로 밀려 앉아도

내가 예약한 기차 자리가 0.8칸이었던가

by 박하린


엄마의 자리란

비좁음을 감수하고 내어주는, 내 옆자리 같다.

기차의 모퉁이 자리에 몸을 구겨 넣고 불편하게 앉더라도,

아이가 곤히 잘 수 있다면

고민 없이 내 자리와 무릎을 선뜻 내어주는 것.


아이는 악의 없이 자기중심적이다.

엄마의 자리를 가져갔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아직 작고 약하니, 결국 엄마는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아마 앞으로도 아이에게서 자리를 양보받는 일은 없고 나는 늘 내어주는 쪽일 것이다.


그런 내가,

끝없이 사랑만 주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때론 그저, 끝없이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 희생은 내 자리일 수도 무릎일 수도

혹은 내 시간이나 체력일 수도 있다.

그래도 아이가 내게 줬던 것들을 떠올리면,

그건 일방적인 희생은 아니다 싶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기의 시절을 지나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알아가는 아이가 된 지금,

가끔은 아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큰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사라지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애절하게 큰소리로 나를 부르고,

내 품 안에 안기면 세상 다 가진 듯 미소 짓는다.


사실 그런 애절한 사랑의 유일한 대상이

나라는 사실이 싫진 않다.

어쩔 땐 귀찮지만,

어쩔 땐 벅차도록 행복하다.


잠든 채로 내 자리로 데굴데굴 굴러와

침대 자리마저 침범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마도, 눈썹도, 콧잔등도, 입술도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미소가 번지고,

뿌듯한 마음이 가슴 안에 조용히 피어난다.


곤한 잠을 깨우는 것도

내 잠자리를 빼앗아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감정을 이 아이 말고 누가 내게 줄 수 있을까.




우리 엄마가

아이 낳으라고 잔소리하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아이를 키우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미소 띤 눈으로 한 번쯤 들려줬더라면 어땠을까.


“왜 낳아야 해? “라는 내 물음에

“그냥 낳아야 하니까. “라고만 답했던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나를 키우며 행복하긴 했을까.


아무렴 어떠랴.


아들은 말한다.

어른이 되면 엄마 아빠처럼

자기도 딸이나 아들을 낳고

우리 부부를 자기 집에 초대해 줄 거라고.


그 말은,

내가 아들을 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스스로도 알고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참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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