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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교리장 Dec 19. 2022

오토남탓러를 위한 마음챙김

오토남탓러 vs 오토내탓러. 당신은 어느 쪽?

> 남탓러 vs. 내탓러


스트레스가 발생하였을 때 지나치게 외향적으로 탓하거나 내향적으로 탓하는 이가 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은 그의 저서에서 전자를 신경병증 (neurosis) 타입, 후자를 정신병증 (psychosis) 타입 으로 분류하였다. 무슨 일만 터지면 남 탓하는 '오토남탓러'가 전자, 뭐든 제 잘못이라고 하는 '오토내탓러' 가 후자일 것이다. 


'오토내탓러' 는 주변의 모든 상황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이 아픈 것도 제 탓이다. 필자 외래에서 이런 분들은 '제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런 병이 걸렸을 까요' 라고 읍소하여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들은 스트레스를 안으로 품기 때문에 쉽게 우울해지며, 심적 고통을 잘 느낀다. 그러므로 이들은 상담치료자를 적극적으로 찾는 경향이 있으며, 마음의 체력만 회복한다면 어려운 상담 과제도 잘 해낸다.


'오토남탓러' 는 모든 것이 남 탓이다. 남탓러들은 스트레스를 외부로 돌리므로 마음이 편하다.  병적 심리를 인지할 수록 오히려 스트레스를 느끼므로 이들은 치료자를 자발적으로 찾지 않는다. 

물론 세상에는 자기 탓 말고 남 탓 때문에 벌어진 일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상황을 남 탓으로 돌린다. 내가 시험에 떨어지면 전날 불길한 소리를 한 친구 때문이다. 약속에 늦었어도 자신이 맞추기 어려운 일정을 잡았다며 되려 화를 낸다. 외래에서는 '검사를 자주 시켜주지 않은 의료진' '잘못된 수술을 했던 의료진' 등을 탓한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므로 주변인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치료를 시도하게 된다. 많은 상담가들이 이들의 치료에 대해 어려움을 표현하였으며, 심한 사례에 대해서는 이들을 '악하다' 고 표현하는 치료자들도 있다. 







'오토남탓러'는 한 쪽 다리가 덫에 걸린 사람과 같다. 이들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만, 사실은 제 다리의 상처가 몹시 고통스러워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다만 이 끔찍한 상처를 차마 마주볼 용기가 없다. 


덫에 걸린 다리를 보살피려면 덫에서 다리를 빼야 한다. 다리를 빼 낼 때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 몇 배는 아플 것이다. 부주의하여 덫을 밟은 자신에 대한 원망도 들 것이다. 이 덫은 무엇이어서 나를 이토록 괴롭히는지도 살펴야 할 것이다.
 

큰 고통 + 자신에 대한 원망 + 문제에 대한 직면 = '책임'이다. 내탓러들은 내적 고통과 자기 원망에 익숙하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문제를 인지하고 직면하기만 한다면 회복될 수 있다. 남탓러들은 책임지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고통, 자아 비판, 용기 (직면) 를 한꺼번에 들어올리려다가는 내가 무너져버릴 것 같다. 이들에게는 내적 고통과 자기 원망을 짧게, 잠깐씩 접하면서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그 동안 사랑하는 이들의 지지는 필수이다. 


다음은 문제에 대한 직면이다. 이 덫은 철사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무조건 잡아당긴다고 빠지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비난은 마구잡이로 힘을 주어 다리를 잡아 빼는 것과 같다. 


누군가를 맹렬히 비난하면 일시적으로 분노가 주는 힘이 느껴진다. 그 힘은 마치 내 자신이 된 것 같아 나에게 권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당신의 분노는 사그라들고 가상의 권력은 생각 속에서 끝나게 마련이다. 빼어질 줄 알았던 덫은 오히려 더 깊게 박혀있을 뿐이다. 


덫에서 빠져나오려면 덫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든거야!! 라는 말이 속에서 들끓는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각자의 덫을 경험했다. 나만 힘든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조금 낫다. 내가 걸린 덫이 어떤 덫이며, 언제 내가 가장 아팠는지를 용기내어 살펴봐야 다리를 빼내고 상처를 소독할 수 있다. 






> 남탓러를 위한 마음챙김


덫, 즉 컴플렉스 라고도 불리는 마음의 여린 부분은 쉽게 떠올려지지 않는다. 이들은 잊혀지지 않는 유년기의 기억, 혹은 최초의 기억 (기억이 나는 시기보다 상당히 어린 시기에 명확하게 나는 기억)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컴플렉스를 구체화 하는 시도보다는 그것이 자극되는 상황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내가 언제 가장 맹렬하게 남을 비난 하였으며,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내 마음속에 불같은 비난을 일으켰는지 떠올려보자. 어떤 사람, 어떤 상황에서 나는 그토록 남을 비난하게 되었던가? 그리고 나는 그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 


이 질문이 중요하다. 상황을 논리적으로 기술하는 것보다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 이 치유의 핵심이 된다. 나를 타자 비난으로 몰아갔던 바로 그 감정이, 소독되지 않은 상처의 가장 곪은 부분이다. 감정은 단순하다. 여러가지 모양으로 드러나 있지만, 기쁘다, 즐겁다, 좋다, 슬프다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감정의 크고 작음이 있을 뿐이다. 


이 감정이 어떤 크기로 내 마음이나 몸의 어느 부분을 침윤했는지 느껴보자. 어깨를 이완하고 숨을 천천히 쉬면서 감정의 근원에 집중해 본다. 이를 심상으로 떠올려도 좋고, 몸의 부위로 떠올려도 좋다. 감정에 집중하였으면, 그 감정을 가지고 내 삶을 반추해본다. 


나는 왜 이 감정에 그렇게 취약하게 되었을까? 내가 미처 대응할 수 없었을 때, 내가 약했을 때, 지쳤을 때 나는 속절 없이 당해야만 했던가?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구했으나, 그 또한 하릴없어 감정을 둔마시키고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는가?

반추된 삶에서 당신을 약하게 만드는 감정의 원인 (혹은 사건)을 발견했다면 그 사건을 가지고 오자. 용기를 내어 가지고 오자. 괜찮다. 그것은 실제가 아닌 가상현실이므로 당신을 해칠 수 없다. 이제 더욱 강해져 스스로를 살필 용기가 있는 당신의 마음 속에 이를 가져 오자. 그리고 잠시 내 안에 머물러도 괜찮다. 이는 석가모니가 수행 중 찾아온 악마 (마라) 에게 차를 건넨 것과 같다. 견디어낸 내 자신, 어쩌면 약했을, 혹은 어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그런 내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자. 이는 상상속의 자신이면서 현재의 자신과 연결될 것이다. 


감정과 고충은 이로써 점차 옅어지게 되고, 상처의 날이 엷어져 점차 당신을 덜 괴롭히게 된다. 이제 마라의 빈 찻잔을 받아 정리하고, 그를 보내고 당신은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취약해진 자신을 지지함으로써 점차 타자 비난이라는 회피 기제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주보지 않은 문제는 반드시 더 커져서 나를 찾아오지만, 마주한 문제는 자신을 성장시키고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을 돕는다. 다소 진부하지만,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강하게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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