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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교리장 Dec 16. 2022

내가 왕이 될 상인가?

타자 구별의 허상

왕은 한 사회에 존재하는 사람 중 단 한 명이고, 그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왕이 아니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는 나에게 모든 사회의 구성원과 분리되는 우월한 잠재적 기질이 있는가? 를 묻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의 대척점에 있는 말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정도가 되겠다.)


단단한 어깨로 전장의 바람을 등지고 중후한 목소리로 명령하는 장수나 왕의 모습에 우리는 열광한다. 전 세계를 통틀어 몇 명만 받을 수 있다는, 흔히 아시아 최초 라는 수식어가 붇는 수상에 환호한다.


이 열광과 환호는 우리의 힘에 대한 갈망이다. 어떤 힘에 대한 갈망인가? 그것은 다수의 타자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낼 수 있는 우월성과 그 우월성의 표현에 관한 것이다.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들은 청장년기 가혹한 경쟁의 시기를 지난다. 수 많은 시험을 거쳐 자신을 평가받고, 그 평가에 따라 주변의 환호를 받기도 하고 비난이나 심지어 체벌을 받기도 한다. 우리는 유년기에 가혹한 시험의 터널의 벽을 뚫고 벗어날 힘이 없었기에, 심장이 터질 때까지 달리거나 혹은 지쳐 주저앉는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친구나 형제들이 뒤에 지쳐 주저 앉는 모습을 본다. 그들은 스스로 절망하고 가족 등 가까운 타자의 슬픔과 사회적 비난까지 짊어져야 한다. 터널 뒤에서 마치 도깨비가 방망이를 들고 쫓아오는 것 같다. 우리는 계속 달리고 달린다. 어느덧 내 바로 뒤의 친구까지 주저 앉아 방망이 세례를 받는다. 그들을 돕지 못한 것이 슬프고 분하지만 방망이가 무서워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 달린다.


30여년을 달리고 달렸다. 어느새 기나긴 터널은 끝나있고 주변은 작은 울타리 정도만 남아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달리고, 내 뒤에 누가 서 있는지 확인한다. 이제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는 울타리를 훌쩍 넘어 넓은 들판에서 멈추어 쉴 수 있는데도 말이다.


터널은 끝났다. 달리기를 멈추고 주변을 살펴야 할 때다.






이성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시기에, 도깨비 방망이로 비유된 사회적 비난과 차별은 직면보다는 회피의 대상이 된다.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기에는 아직 힘도 정신도 약하기 때문이다. 방망이를 맞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 뒤에 내가 아닌 누가 있게 하는 것이다. 내 뒤의 사람과 나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다.


함께 달려야 했던 우리는 본래 동료이고, 형제이며, 같은 경험과 영혼, 양심을 나눈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자신을 타인과 구별해 낸다. 도깨비 방망이에 맞지 않기 위해서! 사실 이들은 자신과 같기 때문에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다. 각자는 모두 완성된 존재이며 존재 그대로 상처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타자 구별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어느 시점부터는 거짓말 (혹은 아첨)을 해야 한다. 남 보기 좋은 이력, 화려한 옷과 장신구, 자동차 등은 좋은 거짓말 거리이다.



도깨비에게 정면으로 마주해 동료나 형제를 구해내지 못했던 나의 나약함은 수치심으로 남는다. 이 수치심은 용기를 내어 도깨비에게 마주하기 전까지, 두려움으로 변해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는 보다 강해보이고, 권위있어 보이는 모든 존재에게 과한 두려움을 느낀다.수치심은 자신을 약하게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는 우리는 주변의 모든 존재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회피하게 된다.


이러한 수치심과 두려움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제는 멈추고 새로운 숨을 쉬어야 한다. ‘나는 왕이 될 상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화려한 이력이나 재산, 심지어 점술의 결과까지 대어가며 자신을 합리화할 필요 없다. 당신은 왕이 될 상이 아닐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다. 당신은 남들보다 앞서 있을 수도 있고, 뒤서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관적인 ‘판단’이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당신은 과거의 자신보다 성장하고 싶은 어른이고, 솔직한 행복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타인과의 비교는 필연적으로 불행을 야기한다. 어떤 주관적

 잣대로든 나보다 나은 사람이 존재하며, 또 어떤 사람이 치고 올라와서 혹은 또 어떤 잣대가 생겨서 내가 다음 도깨비밥이 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한다.





터널은 끝났다. 사실 오래 전에 끝났다.


당신은 지금 무릎 높이의 울타리 너머로 푸르고 아름다운 들판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다. 쫓아오는 도깨비를 두려워하며 옆 친구를 뒤로 밀어내는 것이 즐거운가? 그렇지 않다. 당신의 영혼은 오래 전부터 고통스러웠으며 당신의 표정은 늘 어두웠다. 더 달리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 주변에서 계속 경쟁과 달리기를 요구한다고? 그렇지 않다. 당신이 그렇게 들었을 뿐이다.


울타리 너머 들판에 무엇이 있는가? 무시무시한 도깨비와 싸울 수 있는 무기들이 갖추어진 요새가 있는가? 아니다. 당신이 진정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텃밭을 가꾸거나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바람을 벗삼아 긴 의자에 가만히 누워서 쉬고 있기도 하다. 노래하고 춤춘다. 그들도 힘껏 달리지만 뒤에 누군가를 남겨두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해서, 아니면 타인을 돕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이제 울타리를 벗어나 들판으로 나가 쉬어라. 약화되어 퇴화할 지경인 행복의 중추가 다시 자라도록 보살펴라. 진정한 행복은 강한 진동으로 몸을 울리는 락 음악이 아니라 고요한 현악기의 발라드와 같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행복으로 마음을 적시자. 그제야 당신에게 비로서 평생을 달려온 것의 의미가 조금이나마 보일 것이다. 당신은 이제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서, 타인의 기쁨을 위해서, 양심의 충족을 위해서 달리거나 싸우게 될 것이다.



울타리 밖의 세상에서는 나와 타인의 구별이 없다.


당신은 구별이 없는 공동체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비로소 행복을 찾는다.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추듯, 모든 사람들이 영혼은 하나의 근원으로 출발하였다. 물질의 육체가 빚어진 뒤 신의 숨결로 인간은 영혼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양심을 갖고, 유머와 공감능력을 갖는다. 이들은 인간이 신을 닮은 흔적으로, 모든 인간이 나누고 있는 공통점이며,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초석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도깨비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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