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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교리장 Jan 15. 2023

어쩔 수 없어요. 그게 내 일이라.

평가자 입장에서 본 신입사원의 태도

지난 가을에 아이들을 데리고 동물원에 다녀온 적이 있다.

거기에 유인원류만 모아둔 원숭이관이 있었는데,

일본원숭이 20여마리가 줄을지어 커다란 우리 안을 행군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놀랐다.

어찌나 정돈된 모습으로 발을 맞춰 행군하는지

북한군 열병식 뺨칠 정도의 솜씨였다.


우리는 고릴라가 힘이 세고 생태계에서 제법 우위에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표범이나 뱀과 같은 동물들에 비하면 전투력이 떨어지고 겁도 많아서

그런 동물들이 출현하면 이사다니기 일쑤라고 한다.


조직을 이루는 것은 어찌보면 살아남기 위한 우리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그 안에 이런저런 슬픔이 있는거지.




필자는 인사만을 행하는 과에 속해있지는 않지만, 연차가 차니 이런저런 평가를 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기존의 직원들이나 새로 입사하는 직원, 다른 병원 교수 임용 (외부 심사위원), 인턴 선생이나 실습학생들 등.

형식적인 평가는 큰 부담이 없지만, 입사를 목표로 하는 직원들이나 경쟁적 고과평가가 필요한 (인턴 선생이나 실습학생 등) 을 평가할 때는 심란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참 괴롭다. 안 하고 싶어요.

하지만 어쩔수 없어요. 인간은 약한 존재라 조직을 이루어야 살 수 있거든요.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공정하게 수행하도록 하자.

적어도 남보다는 내가 하는게 낫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자.

잠깐의 감정으로 누군가에게 큰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기준을 세워두자.


이런 생각 때문에 필자는 몇 가지 기준을 마음속에 심어두고 산다.

언제 어떤 인사 평가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단순한 기준을.

신기했던 것은, 많은 평가자들이 이런 기준의 필요에 대해 거의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평가가 필요한 시기의 청년 동생들은

본인의 시야에서 잘하는 것 말고, 평가자의 기준에서 잘 하는 것이 뭔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본인의 시야에서 잘하는 것과 평가자의 기준에서 잘하는 것은 꽤 다르다.

쓴소리라면 쓴소릴 수 있고, 단소리라면 단 소리이겠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게 내 일이라.


그리고 내 경험상 거의 모든 후배님들은 자기가 잘 한다고 생각한다.(과거의 후배님이었던 나 포함이다.)

하지만 평가자 입장에서 보면 의외로 상당히 명확하게 갈려서, 기준을 명확하게 가지고만 있다면 실제로 평가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1. 늦지 말 것.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인사평가자들은 나름의 기준을 갖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인사평가의 결과를 조심스럽게 내리고자 하는 마음은 인지상정이니까.


필자에게 인사 평가에 사용하는 기준 중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딱 네 글자를 꼽는다.

'늦지 말 것.'

뭐, 늦고 싶어서 늦는 사람 없고 늦는게 나쁜거 모르는 사람 없다.

엥? 겨우 그거?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늦지 말 것은 내일 하루 면접에 늦지 말 것이 아니라,

근무평가를 받는 내내 (한 달, 혹은 수 개월, 혹은 수 년) 늦지 말 것이다.

너무 쉽게 여겨졌던 일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당신은 경쟁적 평가의 대상이다. 즉, 누군가와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필자는 이런저런 무술을 많이 배웠다. 오래는 아니고 많이. 권투, 유도, 검도를 각 2년정도씩 했다. 유도와 검도는 초단이다. 권투든 유도든 검도든, 처음에는 자세 잡고 팔 다리 휘두르는 방법을 배우다가 1년 정도 되면 스파링 혹은 대련을 시킨다. 스파링이나 대련하기 전까지는 내가 참 잘하는 것 같다. 주먹에서 막 쉭쉭소리도 나고 그런다. 하지만 상대와 맞붙고 부터는 새로운 현실이다. 내가 머릿속에서 아무리 화려한 춤을 추어도, 한 대 맞고 나면 새로운 청사진이 필요한 법이다.


필자가 이 단순한 기준을 첫 번째로 세우는 이유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며, 이 기준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알기 때문이다.


필자는 입사 첫 해에 1년의 근무 동안 딱 두 번 늦었다. 심지어 두 번 중 한 번은 차 사고가 나서 늦었다.

괜찮을거야.. 라고 위안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나의 두 번의 지각은 평가자들 사이에 조롱거리로 회자될 정도로 큰일이었다. 치열한 전투의 세계에서 이 정도의 실수를 하는 사람은 몇 명 안되었던 것이다.


이후 4년간의 전공의 시절에는 아침 회의에 늦은 적이 없다. 그러니까, 한 번도 없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생각해보면 그 때의 평가에 크게 좌절하여 바닥을 경험한 뒤, 의지의 방향이 바뀌었다. 마치 오래된 괘종시계의 바늘이 움직이듯 끼기긱 소리를 내면서.


어떻게 4년간 늦은 적이 없냐고? 4년이 아니라 그 이후 지금까지도 늦은 적이 없다. 출근시간에 맞추어 출근한 게 아니라 그 날의 일을 절반정도 아침회의 전에 처리할 수 있는 시간, 그러니까 9시까지가 아니라 7시-7까지 출근했다. 처음에는 힘들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하니까 러시아워에 고통받는 일도 없고, 7시부터 9시사이 고요한 공간에서 집중해 업무를 하니 하루의 업무를 대부분 미리 검토하게 된다. 그러니 낮에 여유가 생겨 편안하게 일할 수 있고 퇴근도 늦지 않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업무 성과도 당연히 향상된다.


매번 6시에 일어나려면 전날 11시 넘겨서까지 술을 마시면 불가능하다. 물론 대부분은 술이 덜 깬채로 일어날 수 있겠지만 즐거운 밤을 즐기면 반드시 한 달에 한두번은 알람을 무시하고 못 일어나는 일이 생다. 그래서 필자는 11시 전에는 귀가하여 잔다는 규칙을 세웠다. 물론 새벽까지 늦게 놀면 재밌긴 했다, 하지만 대신 금전 지출이 줄어드는 장점이 생겼다. 월급의 대부분을 먹고 마시는데 썼는데 이렇게 하고 나니 절반 정도는 저축이 가능했다.


출근에 늦지 않는 것은 절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가 강하고 약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의지라고 알고 있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짐해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 강하고 약한 것은 없다. 사실 실제로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지키기 위해서는 습관을 바꾸어야 하고, 이것에는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이 전략을 짜고 실행하는 실행력이 진정한 의미의 의지다. 


그러므로 '늦지 말 것' 네 글자는 스스로를 개조하기 위한 전략을 짜는 영민함과, 이를 해내는 실행력을 함께 보겠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늦고 안 늦고는 정량적 평가이니 누군가를 편애했다는 오해를 받을 여지도 없다.

또한 실제로 누군가를 평가하려면 변별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 기준을 실제로 써보면 변별력도 참 좋다.

잔인하지만 얼마나 좋은 평가인가.




2. 업무 지시 이행 능력

Formal 하게 쓰면 너무 당연한 얘기라서, 그러니까 '시킨대로 하고 있는가' 의 얘기이다. 사회초년생들은 평가자가 보기에는 이런저런 개선점이 많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평가자도 모든 개선점에 대해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참기 힘들 지점에 이르렀을 때 꾹 참고 좋은 목소리로 잔소리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잔소리를 들었다면 초년병 입장에서 이것은 '빙산의 일각' 임을 인지하고, 지시받은 사항을 최대한 지시받은 대로 이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상급자가 지시하는 바는 당장에는 이상해 보일 수 있어도, 중장기적으로는 조직이나 신입 스스로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절대 하면 안되는 것은, 이 지시를 따를 수 없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의학 연구를 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진리의 허무성을 알게 된다. 우리가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인간들 사이의 약속이거나, 관찰의 한계점에서 넘겨짚은 추론에 불과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합리는 언제나 자신의 한계 안에서만 합리적이다. 연관된 사람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시점에서 이미 그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필자는 입사 후 2년 째 상급자가 자신의 노트북(상급자가 나이가 좀 많았다)이 자꾸 에러가 난다며 전산팀에 가서 운영체제를 교체해달라고 부탁했다. 다시 말하면 포맷하고 윈도우랑 오피스를 다시 깔아달라는 말이다. 전산팀은 병원 내 운영체계를 관리하고 점검하는 곳이었지, 이런 잔무를 해주는 곳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노트북을 들고 찾아갔다. 나를 대한 전산팀 부팀장은 여과없이 불쾌함을 표현했다. 적잖이 큰 소리가 오가고, 보다 못한 전산팀의 당시 막내 사원이 노트북을 빼앗아가듯 들고가 '한 시간 후에 찾으러 오세요' 라고 한숨 쉬며 말했다.


생각해보면 당시 나도 철없 전산팀에 쳐들어가 민폐를 끼쳤던 것이 미안하고 우습다. 지금 같았다면 전산팀 또래의 사원에게 조용히 부탁하여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맥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이 때 내가 '교수님, 저희 전산팀은 개인 pc의 운영체제 교체를 해주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가정하자. 논리만 따지면 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나의 인사 평가 면에서는 완연한 패배다.


이 일 또한 우리팀에서 제법 회자되었다. 하지만 앞서 지각하고 나서 회자된 바와 다르게, 좋은 의미로 회자된 것이다.

전투에서 이기려면 대장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병사가 필요하다. '왼쪽 숲으로 100미터 전진' 이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왼쪽 숲으로 들어갔을 때의 문제점을 너무 많이 생각하면 안된다. 그냥 전진하면 된다. 이기던 지던 상관없다. 명령을 수행한 시점에서 당신은 성공한 것이다.


왼쪽 숲으로 전진했을 때의 패배 가능성을 군사학적으로 설명하면 당신은 빠따감이다.



이 두 가지가 나의 평가원칙의 기본이다. 이 둘은 평가자들간에 이견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것들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간략하게 필자가 막내 동생이 있다면 (없지만) 조언하고 싶은 내용들을 아래에 순서대로 적는다.


3. 회식 참석률은 100%, 2차 참석률은 0%.

상급자가 식사를 요청했는데 거부하면 상급자도 사람인지라 상처받는다. 상처받은 자가 좋은 평가를 할 리 없다. 다만 무리해서 2차 식사를 따라갈 필요는 없고, 민망해도 9시 정도에 나오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4. 문서는 예쁘게

간혹 자신은 내용으로 승부한다며 백지 템플릿에 검은 고딕체 글씨로 쓰여진 ppt 슬라이드를 발표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문성은 지식과 경험으로 확보되는 것인데, 초년생들이 상급자를 감명하게 할 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절대 백지 템플릿에 검은 고딕체 쓰지 않는다.) 문서만 예쁘고 깔끔하게 만들어도 절반은 간다. 내가 귀찮은 만큼 윗사람이 편하다.


5. 헬스는 첫 승진 후에

요새는 헬스를 열심히 하는 젊은이들이 정말 많다. 건강을 챙기는 것은 좋겠지만, 과몰입하여 헬스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철학을 만들고 이러면 사실 좀 우습다. 그리고 필자의 경험상 (필자도 벤치프레스 100kg까지 들어봤다. 지금은 50kg도 무겁지만.) 쇠질하면 다음날 엄청 졸리다. 그래, 백번 양보하여 초년생들이 졸 수도 있지만 쇠질하고 졸면 티도 나고 우습다.

사회 초년생 때는 체력 안배가 중요하다. 운동을 하더라도 가벼운 운동을 하고, 일찍 잠들어 근무시간에 완충된 체력을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6. 조사 (弔事) 챙기기

여기서 조사는 경조사 (慶弔事) 에서 경을 뺀 말이다. 물론 모두 잘 챙기면 좋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조사는 가급적 빠지지 않고 챙기는 것이 좋다. 의미가 상대적으로 적어보이는 빙부상, 빙모상 같은 것도 말이다. 경사를 잘 챙기면 당연해 보이지만, 조사를 잘 챙기면 사람이 선하고 신뢰감있게 보인다. 가능하면 조사 때는 찾아가서 인사하고 식사해라. 직계 상사가 아니더라도 이름과 얼굴을 알 만한 사람이면 찾아뵙자. 반드시 언젠가 움이 될 일이 생긴다. 당신에 대한 좋은 추천은 당신의 직계 상사가 아니라 의외의 사람에게서 나올 가능성이 높다.


7. 용모는 단정히

이건.. 당연한 거지만 가끔 이마저도 안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적는다.



또 생각나면 추가하겠음.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꼭 퇴사하지 말고 무난히 승진하여 새로운 삶의 고민을 함께 나눌수 있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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