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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Sep 04. 2018

컬렉터를 꿈꾸며

그림에 대한 생각

          

 신문을 보다가 소박한 컬렉터에 관한 글을 읽었다. 고미술상을 뒤지거나 젊은 작가들의 전시를 찾아다니며 40년 동안 작품을 모아 손주들 생일선물로 준다는 지인의 이야기 끝에, 미술관을 돌아보며 풍요로운 마음을 만들어보라는 내용이었다.

 미술품을 소장하는 일은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가 우선이겠지만, 또 다른 이유로 인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취미생활이지 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칼럼을 읽고 나니 나 같은 그림의 문외한도 소박한 목적으로 컬렉션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미술관에 가서 그림들을 보는 것을 즐기기는 하지만 그림 앞에 서서 꼼꼼하게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편은 아니다. 한때 수채화, 유화를 취미 삼아 해보았지만 그림을 보는 안목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휘둘러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작품이 눈에 띌 때도 있다. 넘기다가 마음에 드는 글부터 읽는 메뚜기식 독서 습관처럼.

어쩌면 그림보다 조용하고 아늑한 그곳의 편안함을 즐기러 간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림이 걸려 있는 널찍한 공간에 서면 마음이 차분해지며 어지러운 생각들이 제자리를 잡게 되고 고요해진다. 사실 공간도 작품의 배경으로 작용하는 전시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들었다.


 미술작품들이 걸려 있는 곳에는 ‘고급지며’ ‘있어 보이는’ 에술의 향기가 가득 머물러 있다가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방금 전까지 길거리에서 일상의 가볍기 그지없는 수다를 떨다가 갤러리에 들어서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 뭔가 깊어진 듯, 품위가 생겨나고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기분이 들곤 한다. 나는 천천히 거닐다가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 팔짱을 끼고 보기도 하고 물러서서 가늘게 눈을 뜨고 바라보다가, 다가가 만지고 싶은 충동을 참고 그림 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대단한 감상 기교나 있는 것처럼 폼을 잡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속 시원한 대답이 필요한데. 시험 정답을 찾듯 정해진 해석을 원하게 된다. 그냥 느껴라 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어쨌건 갤러리를 나설 때는 들어설 때 내가 아니다.


  그렇게 그림들을 보기만 했지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갤러리의 그림들은 그냥 보고 감상하는 것으로만 여겼으니까.

언젠가 좋은 그림을 보면 내게도 ‘스탕달 증후군’이 오는 순간이 있을까. 그림 한 점에 넋을 잃고 두 시간 동안 눈물을 흘리며 보았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언젠가는 내게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문학 스승님인 손광성 선생님의 작품 전시회 때, 선생님의 작품 하나쯤 간직하고 싶긴 했다. 하지만, 미술품을 사 보지 않아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점점이 푸른 눈처럼 내린 ‘기다림’이나 슬픈 이야기가 있는 ‘우미인초’,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보여주는 ‘금지된 안부’ 나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같은 작품들은 가지고 싶었지만, 결정 장애에 걸린 사람처럼 미적미적하는 사이에 다른 주인이 생기고 말았다. 이제 와 도록에 있는 사진을 보니, 보면 볼수록 좋은 것을. 그 그림들이 이 세상에 오직 단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그때는 절실하지 못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아직 나는 그림 한 점 소유하지 못했다. 이제부터라도 칼럼을 쓴 이의 말처럼 젊은 작가의 소품을 하나씩 사 볼까. 조심스럽게 생각 중이다.  


 몇 년 전, 프랑스 남부 툴루즈 교외의 한 공동주택에서 비가 새는 지붕을 고치려다 우연히 그림 한 점이 발견되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여인 유디트가 조국을 구하려고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찌르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었다. 술에 취한 채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적장과 그의 주검 옆에 놀란 듯 서 있는 유디트. 비엔나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에서 본 관능적인 클림트의 ‘유디트’와는 대조적으로 청순하기까지 했다. 그 그림이 바로 ‘다락방의 카라바지오’라는 별명이 붙은 명작 중의 명작이었다.

 어떤 경로로 그리 오랜 세월 동안 천정 속에 감춰져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다락방에서 나와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그것에게 천문학적인 가격이 매겨졌다.   

다락방의 카라바지오란 이름이 붙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할 때, 낙서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바스키아를 예로 들곤 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의 작품 ‘무제’는 바스키아 컬렉터인 일본의 40대 억만장자가 무려 1천245억 원에 사들여 미술계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아무리 뜯어봐도 그 가치를 모르는 나야 현대미술이란 정말 알 수 없어, 하고 돌아서지만. 그림 앞에 서서 흠뻑 빠져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진정 예술을 사랑하는 기쁨이 드러나 있었다.


바스키아 작 '무제'

 그는 나중에 고향에 미술관을 짓고 소장품들을 전시하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한다. 타인들과 아름다움을 함께 한다는 것이 진정 예술의 궁극이 아닐까. 소유하기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른 것을 세상과 공유하겠다는 그 마음. 그 대목에서 나는 그만 감격하고 말았다.  


 시간이 날때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나들이를 가야겠다. 시원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잠시라도 정신을 들어 올려 한껏 풍부해져 보리라. 그림 앞에서 서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갸우뚱거리다가 혼자만의 상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떤 마음으로 그렸을지, 무엇을 표현하려 하였는지, 작품 너머의 세계를 그려 보는 것은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려 글을 쓰는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예술이 생활이고 생활이 예술이다'라는 앤디 워홀의 말처럼 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자주 미술관으로 갤러리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나를 붙들어 줄 그림이 하나씩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것을 사서 거실에 걸어두고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나중에 생길 손주들에게 선물하면 어떨까. 아주 특별한 선물이 되겠지. 그림을 보면서 할머니를, 엄마를 생각하지 않을까.


 오랜 세월이 흘러 내가 선물한 그림들이 모이고, 내 자식들의 아들 딸도 또 그렇게 모아 그녀의 손주에게 선물하고, 손주들의 손주에게 선물한 그림들이 모아지면 후대의 한 후손이 갤러리를 세울지도 모를 일이다. 그곳에서 여러 사람과 아름다움을 같이 나누게 된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상상만으로도 흐뭇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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