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동안, 소나기처럼 지나가버린 일인데도 때론 잊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기억하는 세 분 선생님이 그렇다. 고등학교 때 지리 선생님, 국어 선생님 그리고 중학교 때 가정선생님이다.
게리 쿠퍼 같은 지리 선생님은 몸집만큼이나 푸근한 분이셨다. 웃음을 날릴 때는 주름살 사이에도 정이 묻어났다. 느릿느릿 설명하는 선생님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좋아 매번 수업시간을 기다리곤 했다.
스페인에서 모로코까지 배로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지브롤터 해협을 ‘집으로 올텨 갈텨’ 하면서 재미있게 설명해 주셨다. 나는 지리과목이 좋았다. 인도를 배울 때면 인도의 도시들, 강과 평야, 지방의 산업조차 몽땅 외워 지도에 그리고, 친구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하였다.
그분은 늘 웃으면서 아이들을 잘 꼬집었다. 질문에 대답을 못하면 꼬집고, 교복 허리를 풀어 입었다고 꼬집고 이유만 있으면 꼬집었다. 그러나 우리들을 향한 사랑의 표시라는 공감대가 있었는지 선생님의 ‘귀여운 벌’을 불만 없이 좋아했다. 수학여행 갈 때가 다가오자, 선생님은 수업시간마다 ‘조고랫또’를 선물로 사 오길 주문하셨다. 여행에서 돌아온 우리는 커다란 상자를 안겨드렸다. 선생님은 아이처럼 기뻐하면서 상자를 풀기 시작했다. 마트료시카처럼 포장된 상자를 몇 번이나 풀고 나서야 마지막 상자에서 나온 진짜 선물의 정체.
‘빨간 빨래집게’ 하나!
반장이 아무도 모르게 준비한 선물 때문에 선생님과 우리는 그날 지치도록 웃었다.
세월이 흘러 지브롤터 해협에 갈 일이 생겼으나 여행 황색경보 때문에 못 가고 말았다. 지금도 허허 웃으며 ‘집으로 올텨 갈텨’ 하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이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집으로 가셨을 선생님. 조고렛또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게리 쿠퍼처럼 웃던 선생님.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일부러 질문에 답을 못해서라도 한 번쯤 꼬집음을 느껴보고 싶어진다.
알랭 들롱으로 통하던 국어 선생님은 우리들의 연인이자 우상이었다. 작은 얼굴에 쌍꺼풀이 깊고, 짙은 눈썹에 코가 오뚝한 미남이셨다. 게다가 당시 우리들 사이에 유행하던 장 프랑스와 모리스의 노래 ‘머나코우~’하는 근사한 목소리와 닮기까지 하였다. 천천히 씹으면서 말을 할 때마다 한쪽 얼굴에 보조개가 파였는데, 기품 있는 말들과 문학적인 생각들이 어쩌면 저 보조개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몸이 좋지 않았다. 제대로 아침식사를 하지 못한 데다 감기 기운까지 있어서였다. 수업에 빠질 수 없어 책상에 엎드린 채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어디서 나프탈렌 냄새와 남성용 로션이 혼합된 냄새가 났다. 선생님이 내 옆에 서 계셨던 것이다. 늘 그분의 옷에서는 옷장에서 갓 꺼낸 냄새가 났다.
“자취하고 학교 다니려니 힘들지?”
다정한 아버지 같은 목소리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뜨거운 것이 마구 올라왔고.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담임도 아닌데 내 사정을 잘 알고 계셨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아픈 것은 다 사라졌지만 마음이 뜨거워져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자취집 마당에 피어있는 장미꽃 중에 탐스러운 것만 몰래 꺾은 몇 송이와 편지를 들고. 교무실에 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국어 선생님 책상 위에 누군가 꽂아놓은 꽃을 빼내고 내 꽃을 꽂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꽃병 옆에 가지런히 세워 놓은 편지가 마치 내가 선생님 옆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편지를 읽는 선생님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모리스의 묵직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중학교 때 나는 무척 이상한 사춘기를 보냈다. 가족이 싫었다.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았다. 허구한 날 공부한다는 핑계로 친구네 집을 전전하던 때, 우리 학교에 젊은 가정선생님이 오셨다. 주근깨가 많은 데다 하얀 이를 반짝이며 초승달 같은 입 꼬리로 웃는 모습이 어른이 된 말괄량이 삐삐 같았다.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살던 그분 집에 친구들과 몰려가서 선생님이 끓여 준 완자탕을 먹으며 깔깔거리다가, 그 나이 때 가졌을 법한 고민들을 천방지축으로 털어놓곤 했다. 그분 집에서 자고 학교에 간 적도 여러 번. 언니가 없는 나에겐 선생님이 언니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멋대로인 제자를 재우고 돌보느라 귀찮았을 텐데도 언제나 다정했다. 사춘기의 절정일 때, 가시 같은 반항기에 찔리지 않게 잘 다듬어주셨다. 나는 스타킹 몇 켤레 사들고 가는 것으로 그 많은 고마움을 대신했다고 생각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에도 선생님은 자주 편지를 보내 주셨다. 언제나 편지 말미엔 24시간을 25시간처럼 보내라고 써주셨지만 나는 결코 부지런한 아이가 되지 못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아이들 틈에서 그림자처럼 늘 주눅 들어 지냈다. 선생님께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지 못해 편지가 올 때마다 죄송하기만 했다.
우연히도 남편분이 우리 학교에 전근을 오셨다. 어느 날 내게 와서 선생님께 내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해 주셨다. 시인다운 예민함이 있어서 우리 선생님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었다. 남편분과 같은 학교에 있으면서도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고 어른이 되고 말았다.
내가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그들에게 얼마나 기억나는 ‘그분’이 되고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오래도록 가슴에 담고 사는 한마디 말이라도 남기기는 했을까. 나를 생각하면 그리운 무엇이 밀려오기는 하는 걸까. 누군가에게 그리움이 대상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한겨울 끝자락에 날려 보내는,
끊어진 연실을 달고 멀리 날아 가버린,
연이 사라진 빈 겨울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이 글을 쓴 후, 나는 중학교때 선생님을 수소문했고, 드디어 뵈었다.
우연인지 선생님도 수필 문학지에 등단을 했고 같은 길을 걷고 계셨다.
봄이 다 갈무렵
손수 꺾은 살찐 고사리를 말려 정성스레 싸서
일 년은 먹을 만큼 보내주셨다.
새벽이슬 묻은 고사리를 고붓고붓
꺾는 선생님이 그려졌다.
여전히 나는 선생님께 어린 제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