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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Dec 31. 2020

닥터 마틴

즐거운 의학드라마


 어쩌다 요 며칠 영드에 빠져 살았다. 닥터 마틴. 부츠 이야기가 아니다. 코미디 드라마다. 시리즈물을 보기 시작하면 다른 일을 할 수 없기에 처음부터 맛을 들이지 않는 편이다. 예전에 <소프라노스>를 보느라 몇 날 며칠을 티브이에 빠져 살림이고 뭐고 팽개쳤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 눈에 확 들어왔다. 그 배경 때문이기도 했다. 바닷가 작은 마을 예쁜 동네. 그 마을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었다.


  마틴은 2004년부터 시즌마다 8편씩 15 동안 방영된 드라마다. 영국 남쪽 콘웰 지방의 포트 아이작을 무대로  포트이라는 가상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온갖 질병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드라마 무대인 포트 아이작

 

드라마에 빠져 있다가 산책하러 문을 열고 나가면 작은 바닷가 마을이 펼쳐지고 동네 가게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진료소로 가는 길목이 나오고 티셀 부인의 약국도 보이고,  왕진 가방을  들고 바쁘게 걷는 마틴과, 몰려다니며 마틴을 무안하게 만드는 사춘기 소녀들의 웃음소리도 들릴 것 같고, 조금 내려가면 펍 아래쪽에 라지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버트와 알을 만날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바닷가 마을의 예쁜 모습에 반하여 보기 시작하였다. 작은 만에 항구도 아닌 둑으로 바닷물을 막고 만들어진 마을이 너무 고요해 보였다. 돌로 지은 영국 시골 마을의 전형적인 회색 박공지붕이 뾰족뾰족 솟아  있는 동네. 마주 오는 차들이 교행 하기 조차 힘든 좁은 길과 가방을 들고 겨우 지날 수 있는 골목들이 이어진 곳이다. 낮은 언덕에 키 작은 풀들이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정원에 피어 있는 붉은 꽃들, 작은 광장에 모여 맥주를 마시고 동네 가십거리를 말하며 어울리는 동네. 마을 뒤로는 파란 잔디가 펼쳐진 언덕.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낮은 구릉에 들꽃이 피고, 해가 잘 비치는 고즈넉한 풍경을 가진 마을. 내가 살고 싶은 곳이다. 작은 동네에 살다 보면 사생활이 더러 간섭받기도 하겠지만 그것 또한 작은 마을에 사는 매력일 것이다. 소박한 삶. 글을 쓰고, 해가 날 때 산책하고, 차를 마시고 조용히 하루를 마감하는 날들. 내가 그리는 삶이다. 아름다운 동네에 사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아래쪽 작은 집이 마틴이 일하는 진료소

           

  마틴은 런던에서 전도유망한 혈관외과의사였으나 혈액공포증으로 왕립 외과 전문 의사가 되지 못하고, 어린 시절 자랐던 포트웬의 지역 공중보건의로 오게 된다. 외과 의사가 피를 두려워한다니.  설정부터 코미디다. 189미터의 알렉산더 마틴 클룬즈는 완벽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의사 역을 소화한다.


 마음에 없는 너스레는 절대 하지 못하는 직설적이고 괴팍하며 까칠한 마틴은,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한다. 마을에 응급상황이 생길 때마다 왕진가방을 들고 전력 질주하는, 의사로서 직업의식을 발휘하는 그가 숭고하기까지 하다. 원래 의사가 아닌가 할 정도로 연기가 천연덕스럽고 자연스럽다.


루이자를 사랑하는데도 표현하지 못하는 마틴은 시즌 8이 다 끝나도록 한 번도 웃지 않는다. 늘 인중에 두 줄을 세우고 인상을 쓰는 모습으로 나온다. 코미디언인 그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이상하고도 괴팍한 태도로 연기하는 모습이 현지인들에겐 얼마나 폭소를 자아내게 했을까.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목적지를 향하여 바쁘게 걷는 그. 주변의 것을 살피지 않는 오직 자기 일에 집중하는 마틴. 고함지르고 직설적으로 말해 사람들을 무안하게 하고 상처를 줄 때도 많다.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어딘가 병적인 것들만 눈에 들어와 의학적인 분석으로 들이대다가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일상에서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그가 일단 자신의 업무를 시작할 때는 엄청난 말을 쏟아낸다. 자신의 일에서만큼은 완벽한 실력을 드러낸다.


 사랑스러운 루이자. 캐롤라인 캣츠가 루이자 역을 맡았다. 정이 많고 따뜻하지만 자기주장도 확실한 캐릭터다. 루이자는 열두 살에 엄마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하며 자라다 보니 자의식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교장직을 맡으면서  점점 바쁜 생활을 보낸다. 마틴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삐그덕 대며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구석이 없다. 그러나 마틴이 위급상황에서 수술을 해야 할 때, 혈액공포증으로 힘들어할 때마다 마틴을 도와주고 의사로서 능력을 존경한다.


시즌 내내 마틴은 이런 얼굴이다.


마틴이 소리를 지르며 진료를 할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대사들 속에 스며든 유머가  억지스럽지 않았다. 딱딱한 말씨지만 알고 보면 따듯한 마음도 있고 별로 살가운 행동을 하지 않지만 마음은 무너지는 모습들.


한 번도 벗지 않는 양복, 드라마에선 평상복을 입은 마틴을 보지 못한다. 요리를 할 때도 양복을 입고 하고 들판에 피크닉을 갈 때도 양복을 입는다. 그야말로 영국 신사다. 아들을 안은 마틴이 정말 웃기다. 아기 엉덩이를 손으로 받치고 한쪽으로 가방을 잡듯 아기를 안은 마틴.    



  조연들의 역할도 빛난다. 언제나 일을 벌이고 사고 치는 배관공 버트 라지는 실수와 잘못으로 일을 그르치지만  긍정적이다. 아들 알을 혼자 키운 따뜻한 아버지기도 하다. 순박하고 겁이 많으며 광장 공포증을 앓고 있는 포트경찰  펜헤일, 마틴을 존경하며 따르는 티셀 부인, 약사인 그녀는 드라마 내내  받침대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나온다. 마틴에 대한  망상장애로 마틴과 루이자의 아들을 납치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 마틴과 비슷한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차분함이 빛나는 범죄심리학자인 고모 루스 엘링엄, 사랑이 많은 작은 고모 조앤 엘링엄.... 그리고 빼놓을  없는 털북숭이 강아지들 


 이외에도  번이나 바뀌는 진료소의 접수원들은 제멋대로이며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들이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작은 피부 발진에서부터 심각한 희귀병까지 다양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진료소를 찾아 오지만 마음이 아픈 사람도 많다. 마틴이 해내지 못하는 부분을 동네 사람들을  아는 접수원이 해낸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상하고 희한한 병을 가진 엄청난 환자들이 있긴 하지만)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다정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이웃처럼.    



 

 마틴은 루이자를 사랑한다. 루이자도 마틴을 사랑한다. 하지만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가까워지다가 자꾸만 일이 생길 때마다 당연히 맺어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졸아들었다. 그들이 막 결혼하려고 했을 때 나는 정말 행복했다.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지고 해피앤딩을 보게 될 것 같았다.


 

드디어 마틴과 루이자가 짝을 이루게 되고. 하지만 결혼식 날 결혼은 깨어지고 만다. 자신의 모습을 잘 아는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만 어울려 부부로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 결국 각자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지만 서로는 늘 그리워한다. 그들의 사랑을 이어 줄 매개, 제임스가 태어난다.


마틴과 루이자의 아들 제임스

 

실수하고 후회하며 사는 평범한 우리네 사회를 보는 듯한 갖가지 이야기들이 매력적인 드라마였다. 등장인물들이 우리 주위에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뭔가 한구석에 결함이 있는 상처들이 있는 인물들. 끈적한 러브라인도 없고 질질 끄는 것도 없다. 현실 속에서 깨지고 망가지지만 그 속에 따듯함과 유머가 녹아 있다.


 회상이나 반복이 없이 바로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며 빠른 이야기 전개가 좋았다. 좌충우돌 위험한 사건들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사건들 속에는 자연스럽지 않은 장면도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들 속에 인간적인 애정을 깔고 이야기들은 이어진다. 엄청난 대사 속에 인생을 사는데 필요한  반짝이는 고급스러운 대화들이 셰익스피어의 나라답게 느껴진다.  

 루이자가 초등학교 교사로 나와서 더 내 마음을 끌었는지 모른다. 학교가 무대이고 아이들 이야기 거나 교사가 나오면 더 관심이 간다. 어쩔 수 없는 오래된 직업의식의 투영이다.




나는 이 드라마를 세 가지 관점으로 보았다.

먼저 일반적인 영국인들의 모습은 어떨까.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겠지만 드라마 속에서 일정 부분 현실을 볼 수 있다. 강해 보이지만 연약함을  드러내고 상처받고 조그만 일에도 위로를 얻는다. 아픈 사람들이 반응과 그들과 연결된 사람들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육체적인 병보다 마음의 병으로 인해 아픈 이들이 생각보다 더 많다. 마틴은 아픈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길을 가다 싸움에 휘말린 아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지 못하는 나의 직업병을 떠올리게 했다.


부모란


 드라마는 부모의 양육태도가 어떤 어른을 만드는지 잘 보여준다. 마틴이나 루이자 모두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다. 루이자는 12살 때 엄마가 떠났고 스스로 인생을 결정해야 했다. 다행히 밝은 성격의 루이자는 긍정적으로 자랐다.


마틴의 부모는 매우 차가운 사람들이다. 아들이 남편과의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생각하는 차가운 엄마. 아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의 삶이 깨졌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아이를 기숙학교에 보낸다. 방학 때도 고모 집에서 자라게 한다.


 친아들한테 냉랭한 태도로 일관하는 엄마와, 엄격한 아빠. 그들 사이조차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서 태어난 마틴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공감하지 못한다.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그래야 편하다고 느낀다. 자기 세상이 변하면 불편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 속에는 따스한 감정이 있지만 표현하지 못한다. 싸늘한 부모의 태도를 보면서 부모의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엄격함은 잘 정돈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 같지만 마음을 닫게 하고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사랑해줘야 할 책임이 있고, 아이들은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랄  권리가 있다. 어린 시절 충분히 사랑받고 자란 아이들은 그다지 큰 문제가 없다. 자라면서 물론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회복탄력성이 높다.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줄 줄 안다.


아들이 자신의 인생에 방해물로 여긴 마틴의 엄마


부부의 역할이란


끊임없이 마틴을 향한 애정이 어떻게 부부가 되어 가는지 보여준다. 다정하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변함이 없는 마틴과 충돌하면서도 다독여 주고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 해 주는 따스한 마음을 가진 루이자.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며 자란 그녀도 자존심이 강하지만 마틴이 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출근하는 아내에게 잘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쯤 해 줄만 한데...  마틴을 마음 깊이 이해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고 있는 마음은 언젠가 연결되고 만다. 사랑의 힘은 강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며 그렇게 부부가 되어간다

       

그들을 보며 우리 부부를 돌아본다. 여행을 하거나 영화 보기를 좋아한다. 비슷한 취향이 있는 것은 다행이다. 좋은 영화를 고르면 늘 고개를 한 방향으로 하고 같이 본다. 그렇게 같이 느낄 수 있으니 좋다. 오래 살았다고 서로를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속속들이 다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서로에게 심리적 물리적 공간을 이해해 주면서 다만 같이 즐기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닥터 마틴을 보면서 같이 웃고, 사랑이 깨질  같이 아쉬워했다. 마틴을 보는 내내 행복했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포트 아이작을 매일 걸으며 드라마에 나온 이들을 만나는 여행을 했다. 포트바다 냄새가 화면을 뚫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등장인물들이 우리를 향해 웃고 말을 걸고 같이 동네에 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드라마 정말 재미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드라마 속 포트웬




 며칠 후 아버님 기일에 고향 시댁에 가면 바닷가에 가 볼 것이다. 찬바람이 불겠지만 바닷가에 가서 걸어보려 한다. 포트 아이작 같은 기분을 느끼며. 마틴과 루이자가 또 어떤 삶을 이어갈지 그려 보고 싶다.


 시즌8까지  보고 나니 이제 낙이 사라졌다. 시즌 9 기다려진다. 공갈 젖꼭지를 빨던 제임스가 많이 자라 있을 것이다. 대디, 마미라고 말도 많이  것이다. 키가  마틴의 머리가 부딪치지 않게 진료소 천정도  높아져 있을까. 짝이 생긴 강아지들은 어떤 말썽을 부릴까. 독특한 병을 가진 환자들이 얼마나 많이 생길까.  루이자는 어떤 일로 마틴과 토닥이고 화해하이야기를 만들어 나갈까.

어서 시즌 9가 포트웬 바닷바람과 함께 날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빨리 보고 싶어요! 독 마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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