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을 맞으러 가는 수요일
2012년 12월. 그 해가 닫히고 있었으나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끌어주신 문단의 대선배 박종금 선생님의 소개로 광화문 조선일보사 건물에서 일현 손광성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연세가 있었지만, 적당히 넓은 이마, 유난히 검은 눈썹, 뚜렷한 입술 윤곽의 수려한 인상이었습니다. 고급스러운 회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 푸른 넥타이와 소매를 반듯하게 여민 금색 테두리 커프스단추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호수처럼 잔잔하지만 지성을 꿰뚫는 눈빛은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치밀한 언어, 적절한 발화 속도, 수많은 책들의 인용…. 선생님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에게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였습니다.
직장에 매어 있어 수요일 낮 강의에 매번 갈 수는 없지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어떻게든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문학의 언저리에서 늘 서성거리기만 하던 갈증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 것 같았지요. 그러나 한 달에 한 번으로는 더 목이 말랐습니다. 학교 행사를 피해 격주로 다니다가 나중에는 매주 조퇴하고 강의를 들으러 갔습니다. 결재를 맡고 나가는 등이 따가웠지만 견디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을 하교시키고 헐레벌떡 학교를 나설 때마다 나는 소풍 가는 아이 같았습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콧노래가 나왔습니다. 강의실에 들어서면 선생님은 온화한 얼굴로 급하게 들어서는 나를 반겨주곤 했습니다. 새로운 공부는 그대로 가슴에 들어와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선생님의 모든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받아 적었습니다. 집에 와서 그것을 다시 다른 노트에 정리하고, 문우회 카페에 수업일지 형식으로 올리기도 하면서 그대로 내게 스며들어 작은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강의를 듣고 집으로 갈 때면, 너른 바다를 헤엄치다 온 것처럼 가슴이 트였습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통찰력을 접하고 나면, 늘 충만한 기분이 되곤 했습니다.
강의를 받고 온 날은 밤이 깊도록 글을 썼습니다. 그동안 할 말이 이렇게 많았을까, 뚝딱 한 편을 쓰고 나서 내가 쓴 글에 그만 도취되곤 했습니다. 퇴근하다가도 문장을 떠올리며 먼 나라로 가다가 운전대에 종이를 올려놓고 메모를 하다 보면 어느덧 신호가 바뀌고 경적 소리가 울려야 정신을 차리고 운전을 할 만큼 머릿속 한 부분이 온통 글쓰기로 차 있었습니다. 글쓰기가 그토록 재미있어졌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재미의 단계를 지나면 고통이 다가옵니다. 배울수록 글쓰기도 힘들었습니다. 자아도취에 빠진 글을 퇴고할 때는 어찌나 졸렬하고 허세 투성이인지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한 단락 혹은 두세 단락 써 놓기만 하고 마무리를 하지 못한 글들이 쌓여갔고 다시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쓰려는 글을 붙들고 깊이 내려가는 힘이 아직은 부족했던 거지요. 글을 쓸 때마다 어깨 뒤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떤 단어가 적합할까, 어떻게 구성할까, 더하고 빼야 할 것은 무엇인지, 추체험에 사유와 성찰이 어떻게 드러나게 할까, 나만의 체험을 어느 정도 보여주어야 할까, 형상화는 어떻게 하고 어떻게 써야 곡진한 표현이 될까. 어느 부분에서 객관화하여야 할까…. 이런 고민들이 글쓰기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작품을 선생님께 지도받을 때, 아주 드물게 흡족한 한 마디를 듣기도 했지만 더 곡진하게 써야 한다는 지적을 받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곡진하게'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대상을 세밀하게 깊이 들여다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길 위에서>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춘천 실레길을 걸었던 체험에 어린 시절 걸었던 오솔길에서 만난 우리 동네 좀머 씨 같은 사람에 대한 생각을 덧붙인 글이었습니다. 문학적 형상화가 부족하다면서, 순간순간의 느낌을 깊이 있게 쓰라고 주문하셨습니다. 나는 불 가에 있는 비닐처럼 오그라들어 그만 사라지고만 싶었습니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혹독하게 수련을 받았다는 선배님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나마 조금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문학적 형상화’를 화두로 삼아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글 속에 구현해야 할지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으로 읽기가 부족했지요.
여행하면서 다닌 광장에 대한 생각을 쓴 <광장에서>를 합평할 때 나는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제목을 보고 뭔가 있을 줄 알고 무척 기대했어. 속 빈 강정이야. 독자에게 사기 친 것이야.”
주제가 빠져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어이 눈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글을 조금 쓸 줄 안다’는 자만심과 허영으로 글을 포장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껍질을 깨는 아픔이 참으로 컸습니다. 박수는 격려도 되지만, 망치게도 합니다. 선생님은 후자를 더 염려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 단련 속에 빨간 펜으로 수정한 ‘딸기밭’ 같던 글은 차츰 ‘별이 하나씩 떠 있는 밤하늘’이 되어가면서 말라버린 대추 같던 마음도 조금씩 촉촉해지고 있었습니다.
등단작이 된 <아버지의 참깨밭>을 썼을 때, 잊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도 참깨 밭을 가졌지. 나의 참깨 밭에 아이들이 자라고, 커서 세상으로 나가고…. 누구나 인생에 고소한 참깨밭 한 뙈기 가꾸고 있잖아? 난 제자들의 이런 소재를 보면 훔치고 싶어.”
나는 상기된 얼굴이 되었고, “선생님께 드릴게요.” 한 적이 있습니다.
강의 때마다 선생님이 던지는 질문에 선뜻 떠오르는 것을 대답했습니다. 강의하는 사람에게는 맞든 틀리든 즉각 반응해 주는 리액션이 강의에 활력을 주니까요. 수강자들이 그만큼 학습에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엉뚱한 대답으로 ‘모자란 센서’나 ‘고장 난 센서’가 되기도 하지만, 어쩌다 선생님이 원하는 대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 우리 오센서가 잘 말했네.”
그럴 땐 사탕을 받은 아이처럼 우쭐해지곤 했습니다. 나는 항상 선생님께 듣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좋았어, 잘~ 썼어!”
그 말 한마디를 듣는 순간이면 나는 하늘을 날 것 같았습니다.
누가 언제 어떤 글을 썼는지, 그 많은 제자들의 글을 남김없이 꿰고 있는 선생님의 세세한 기억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수강생들을 일일이 채근하며 치열하게 쓰기를 강조하셨습니다.
“수필이 다른 장르에 비해 폄하되는 것이 안타까워.
장르에는 우열이 없어.
다만 세상에는 읽을 가치가 있는 글과
읽을 가치가 없는 글이 있을 뿐이지.
수필에 자부심을 가져요.”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telling이 아니라 showing을 해라, 판단하지 마라, 독자의 몫으로 남겨야 한다, 주제가 드러나는 부분에 곡진하게 써야 한다, 대상을 비교, 대조, 분류, 분석하는 사고력을 키우는 동시에 치밀하게 파고드는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 “리얼리티는 디테일에 있다.”라며 세부적 묘사 없이는 실감도 형상화도 불가능하다... 힘주어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을 깊이 새겼습니다.
나는 디테일이 부족합니다. 언제나 아우트라인과 당시의 감정만 어렴풋하게 떠오를 뿐입니다. 대충 보고 치밀한 관찰력과 사고력이 빈약한 탓이겠지요. 쉬클로프스키가 말한 낯설게 보기를 연습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이 언제면 생길지 그게 고민이었지만, 계속 쓰면 나아진다는 말에 기대기로 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겠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아야겠다,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면서, 수필의 아이덴티티는 곧 ‘진정성’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 진실한 수필 한 편을 읽는 것은 정현종의 <방문객>의 시구처럼 ‘실로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에 그렇습니다.
어느 때는 선생님이 빈 교실에 혼자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게 하셨습니다.
“글을 쓰지 않을 때 항상 무엇인가 공허했어.
다른 것에 관심을 쏟아봤지만 계속 헛헛함이 남아 있었지.
내가 죽어 화장을 하면 타다만 고구마 덩이처럼 응어리가 있을 것만 같았어.
그런데 이제 응어리가 없어. 잘 타서 곱게 재가 된 것 같아.
누구에게도 만족한 삶은 없어.
그러나 글을 쓰며 응어리를 태울 수 있지.
이것이 글쓰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치유의 기능이지.”
그 말씀을 하는 선생님이 정말 가루가 되어버릴 것처럼 조바심이 났습니다. 하지만 곧 선생님 가슴속에 남겨진 고구마 덩이 같은 응어리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나는 상상을 했습니다. 아직은 부서질 때가 아닙니다.
글을 쓰면서 나는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살아오면서 썼던 일기도 나를 다독이기 위한 글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 안에 가라앉은 앙금들을 드러내면서 스스로를 보듬고 있었습니다. 수필 강의 < 내 삶에 풍경 담기>는 그렇게 삶을 치유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근엄하게 강의를 하시다가 덧니가 드러나게 웃을 때는 꼭 아이 같습니다. 그날 손녀 이야기를 할 때 선생님은 더 환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여섯 살 손녀와 주고받은 국제전화.
"그래, 00아, 무슨 반찬을 먹니?"
손녀가 무슨 반찬인지 모르니 엄마가 옆에서 속살거립니다.
‘멸치’
손녀는 큰소리로 말합니다.
"멸치 반찬요."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다시 묻습니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거네."
"또 무슨 반찬?”
손녀 옆에서 엄마가 속살거리는 소리가 또 들려옵니다.
‘계란부침’
손녀는 또 더 큰 목소리로 말합니다.
"계란부침"
"어? 그건 귀한 손님만 주는 건데? “
손녀와 긴긴 얘기를 하는 귀여운 할아버지.
선생님의 수필 <귀여운 도둑>에는 하나밖에 없는 선생님 친손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번 다녀갈 때마다 “내 마음 한 줌씩 집어가네.”라고 말입니다. 선생님 그림 전시회 때, 내내 친손녀의 손을 꼭 잡고 오프닝 멘트를 하시던 모습이 액자에 담겨 풍경이 됩니다. 참 멋진 할아버지입니다.
"한 달에 한 번 광화문의 교보문고에 가지. 용인 우리 집에서 거기까지 왕복 네 시간이 걸려. 거기 가서 책을 고르고, 사서 보는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리지. 그 한 시간 반 동안의 소일거리가 나를 행복하게 해. 먼저 책을 고른 후, 외서 코너에 가서 책을 들여다봐. 나이 지긋한 분들이 그 책들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그것을 보는 것조차 아름답고 행복해. 내가 그들처럼 그런 행동을 하면 나도 누군가에게 멋진 풍경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잖아. 책을 산 후 카페에 앉아 한 이십 분 새로 산 책을 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다 직행버스가 오면 집으로 오지."
"굳이 그 멀리까지 가는 이유가 있어. 광화문, 청진동, 무교동 같은 오래된 배경은 쉬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야.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배경이지. 세월은 인간이 못 만들어. 그 배경 속에 나의 많은 삶이 지나갔지. 광화문이나 무교동에서 친구들과 만나 문학을 논하고 인생의 숱한 고민에 술도 마시고..."
찻집에 앉아 책을 들고 이리저리 넘기며 책을 읽는 선생님이 모습을 떠올리니 기품이 있습니다. 그런 풍경을 닮고 싶어집니다.
어느 날 ‘삶의 객관화’를 말씀하실 때, 나는 선생님이 다섯 번을 읽었다는 장 그르니에의 <섬>을 떠올렸습니다. 선생님이 그 책 속의 ‘마죄르 호수의 보로메 섬’이 아닐까 상상한 적이 있습니다. 쉬 변하지 않는 선생님의 풍경입니다. 남들에게 기억나는 어떤 풍경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일까요. 나도 그런 풍경 하나 남기고 싶어집니다.
한 번은 선생님이 아주 화색이 도는 얼굴로 수업에 들어오셨습니다. 34년 만에 만난 제자와 함께 식사와 반주 두 잔을 하고서, "기분 좋아 보이지?" 하셨습니다. 워낙 출중해서 의대를 갔지만 의사가 싫어서 유학을 갔고, 서양 의학의 역사를 공부하여 서울 의과대학 의학사 박물관장이 되었답니다.
“너는 큰 리더가 될 거야. 하지만 어느 하나를 취하고 나머지를 포기하는 인생은 살지 마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리고 네가 되고 싶은 사람이 돼. 그것이 진정한 삶인 거야.”
그 제자는 선생님의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았다는 말을 듣고 군자삼락 중에 하나를 얻은 듯 보람을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너의 선생도 놀지 않았어. 나도 너만큼 노력했다. 내 그림을 다 보여줄 수 없지만 그림도 그려서 전시회도 하고, 책도 네 권 내고, <에세이피아>도 창간하고, 한국 고전수필도 번역하고… 열심히 살았어.”
마치 여고생들 앞에 서 계신 사십 대 선생님으로 돌아가신 듯했습니다. 덩달아 나도 신이 나면서도 눈물이 나려 했습니다. 나도 그런 제자 한 명쯤 키우고 싶었습니다. 나로 인해 인생이 멋지게 바뀐 제자에게 ‘나도 너 만큼 열심히 살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뿌듯할까 하고 말입니다. 나중에 삶을 돌아볼 때 나도 최선의 삶을 살았노라 할 수 있어야겠다고 다짐도 해보았습니다.
110년 만의 폭염이든, 한파든 선생님은 휴강일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날은 유난히 냉기가 살을 파고드는 한겨울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는 탈출 영화가 좋아. 인생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의 반영이겠지. 인생을 감옥이라고 여기는 것이지.”
과학적인 지식을 최대한 이용하고 부정한 교도소 책임자를 멋지게 녹다운시킨 <쇼생크 탈출>은 전설 같은 영화지요. 나는 인생이 감옥 같지는 않습니다. 낯선 곳을 즐기지만 탈출을 꿈꾸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언제나 탈출을 꿈꾸시나 봅니다. 기어이 제주도로 가시고 그곳에 당신의 왕국을 만드셨습니다. 꽃과 놀고 벌레와 대화하고 바람을 마시고….’ 남자의 일생은 정원 가꾸기로 완성된다.’고 늘 하시던 말씀을 실천하셨습니다. 어쩌면 ‘탈출’은 선생님의 두고 온 곳으로 가는 ‘귀향’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다가, 혹은 글을 쓰다가 자신에게 주문을 건다고 합니다.
“결국 내가 이길 거야. “
자신에게 거는 암시. 노력만큼 위대한 것은 없으니까요. 내 손에 남는 것을 놓고 가면 그만이지요. 하지만 살아오면서 치열한 노력들이 있어야 허망한 인생이 가치가 있어진다고 하십니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나도 주문을 만들었습니다.
"좋은 것들이 내게로 오고 있다!"
“뭔가 해야겠다는 꿈이 있으면 늙지 않아. 자기 일이 있어 열정적으로 했으면 되는 거지. 호기심, 열정은 인간을 이끌어가는 힘이야. 무엇을 하든 열정을 바쳐서 해야 해.”
완벽한 삶은 없지만 열정과 호기심은 늙지 않게 하는 묘약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어느 수요일, 아이들을 가르친 이야기를 작품으로 냈습니다. 합평을 하면서 선생님은 회한에 젖은 얼굴로 먼 날을 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인생은 주흔이야. 살아보니 인생이 옷에 흘린 술 흔적이야. 이 말에 모든 것이 들어있지. 뭣도 모르던 초보시절, 법과 질서만 앞세우고 아이들을 몰아세웠던 일들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허물이고 잘못이었지. 술 흘린 흔적이라는 말을 그래서 하는 거야, 이제와 돌아보니 깨지고 더럽혀진 흔적밖에 없어.”
술 흔적밖에 안 되는 것이 인생이라니. 하지만 그 말에 아직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할 일도, 사랑해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날마다 바쁘게 돌아가는 내 삶에 ‘한 방울 흘린 술 자국’이란 말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선생님은 많이 살아서 그런가요. 늘 허무하다 허무하다 하십니다. 그 나이가 되면 나도 그럴까요. 가끔 인생이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긴 있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선생님께 메일을 썼습니다.
오늘 선생님이 하신 말씀 ‘인생은 주흔’이 기억났습니다.
선생님이 허무하다 하실 때, 저는 슬픔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평생 동안 그 길고도 넓은 흔적이 어찌 술 한 방울 흘린 흔적에 빗대겠습니까.
저도 선생님만큼 세상을 더 많이 살아보면 그런 생각이 들까요.
아직은 할 일이 많고 마음이 바쁩니다.
입학한 일학년 아이들이 오늘 처음으로 받아쓰기를 했습니다.
“나, 너, 우리, 어머니, 아버지...” 10개의 단어를 쓰는 것인데
좀 늦은 하진이가 ‘너’는 ㄴ만 쓰고, ‘아버지’는 ㅇ만 쓰고
손끝으로 연필 끝을 만지며 골똘하게 글자 모양을 그려내려는 그 모습이
꼭 선생님께 글공부를 배우는 제 모습 같아 보였습니다.
하진이도 언젠가는 ‘아버지’, ‘어머니’, ‘동물원’을 정확하게 ‘그려낼’ 날이 오겠지요.
저도 깊이 있는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그런 날이 오겠지요?
다음 날 아침 선생님의 답장이 와 있었어요.
나도 잠이 오지 않아 컴퓨터를 켰다네
늦게 마신 커피 탓이긴 나도 마찬가지
가끔, 내는 아이들 이야기 읽을 때면
자네 따뜻한 심정 고맙게 생각되더라
아무려나 그리 곱게 살게나
모든 생이 주흔 같기만 한 건 아니라네
봄날 무명 적삼에 든 화흔花痕 같은 인생도 있다네
지금쯤 곤히 잠들었길 비네
시 같은 화답을 읽으며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선생님을 만나 글공부를 하는 동안 일곱 번의 봄이 지나갔습니다.
선생님은 “봄볕이 떨어질 때 자작나무 밑에 핀 노란 수선화 같은 순간이 내 삶에 몇 번이나 올까” 하시지만, 만남으로 시작한 이 글을 헤어짐으로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삶에 전력을 다 했어. 아이들을 키울 때는 그것에 전력하고, 지금 내가 의도한 내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 지금은 나를 위해 사는 시간이야. 누구도 나에게 비치는 햇살을 막지 마라. 이런 마음이지."
‘나에게 비추는 햇살’. 그 햇살을 맞으러 가는 수요일이 언제나 기다려집니다.
수요일마다 문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배우고 있습니다.
나도 내 인생 어디엔가 ‘화흔’ 하나 남기기 위해서 말이죠.
느닷없이 닥친 전염의 시대는 336번째 강의를 마지막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학교일로, 혹은 다른 일로 많이도 빼먹은 수업이 아쉽기만 합니다. 다시 강의실에서 만날 날을 기다리지만, 이 기다림은 쉬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미수에 드신 우리 선생님은 멀리 바다 너머 서귀포에 계십니다. 선생님과 함께 할 337번째 수요일은 언제 올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선생님과 수업을 하던 시간이 오래 지났습니다.
벌써 5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성장하였을까 돌아봅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한 시도 잊지 않고 아침마다 글쓰기를 이어갔습니다. 수많은 글이 쌓이고 그만큼 내면의 글 근육도 생긴 걸까요.
가끔씩 안부 전화를 드리면 선생님은 "글은 잘 쓰냐?" 하고 확인을 하십니다. '덜 익은 제자'에게 무엇이라도 심어주고 싶으셔서 통화가 길어집니다. 기인 화가 최북의 이야기일 때도 있고 손곡 이달의 고전시 한 강의를 듣기도 하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나눕니다. 스승의 가르침이 제자에게 스며든다며 장 그르니에와 까뮈의 애틋한 문학적 교류를 밀씀하시자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교차하지 못하는 끊어진 사슬 속에서 선생님 말씀을 한 마디도 아까워 놓칠 수 없어 받아 적습니다.
통화가 끝나면 선생님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정리하고 스승의 글을 다시 읽습니다. 언급하신 책을 찾아 읽고 인용한 작품을 찾아 분석하고. 그리고 나는 씁니다. 선생님과 수십 분 통화를 하고 나면 한층 자란 기분이 듭니다.
선생님은 제일 북쪽인 함경도에서 나셨고 나는 제일 남쪽 제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나는 고향을 떠나왔고 선생님은 나의 고향으로 가셔서 당신의 왕국을 건설하셨습니다. 아직 나는 '나만의 정원'을 가꾸느라 문학의 숲을 헤매고 있습니다.
기약할 수 없는 수업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간간이 이어진 통화로 끊어지지 않고 수없이 많은 ‘수요일’을 만나고 있었던 겁니다.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던 338번째 수요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 N번 째 수업을 받으며 '수요일의 문학햇살'은 언제나 내게 비추고 있었던 거예요. 그 햇살로 나의 정원에도 씨앗이 싹트고 잎을 내밀고 있었던 겁니다. 앞으로도 수요일 강의는 계속될 것입니다.
어느 날, 선생님과 올가 토카르추르의 동화 <잃어버린 영혼>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림동화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동화를 쓰시고 싶다셨어요. 옆에서 보지 않아도 선생님 눈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어요. 선생님이 그린 단아하고 세밀한 동양화에 아름다운 글이 얹어진다면 또 얼마나 독특한 그림 동화가 될까요.
내년에 있을 전시 준비로 벽 만한 세필화 그림을 그리면서 지금도 꿈을 꾸고 계신 스승님.
신체적 안위에 온정신을 쏟을 그 연세에 아직도 멋진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는 스승님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꿈꾸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