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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나의 궁전

by 오설자


너의 갈라진 팔 위에

하늘 위 궁전 만들고

찐 감자 먹고 매미소리 들었지

하늘 오르는 꿈을 꾸었지

감꽃목걸이 걸고 풋감씨 삼키다가

뺨에 닿는 빗방울

너의 겨드랑이 속으로 숨어들었지

명절 다가오면

목 매달린 짐승

울부짖는 숨결에

떨리는 지붕에도 하늘에도

거친 껍질로 소름 돋아났지

어린 우리들 키워내고 집 떠나보내며

옹이 박힌 손 멀리멀리 흔들어 줄 때엔

거친 줄기에 검은 버짐 번지고

오랜 뿌리 쇄골로 갈라져 있었지

참기름이며 무말랭이며 싸 준 보자기에

아직도 희미한 등불 두어 개 켜고 서서

기다리는 나의 감나무




아침이면 감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과 참새 소리가 나를 깨운다. 감꽃이 피면 창문 너머 진한 감꽃 향기가 넘어온다. 마카로니가 쏟아진 것처럼 작고 연노란 별꽃이 가득 떨어지면 그걸로 달콤한 꿀을 빨아먹고 감꽃 목걸이 만든다.


감나무줄기가 가장 굵은 갈라진 가지에 아버지가 단단한 널빤지를 얹어 주고 엄마가 헌 담요를 깔아 준 거기는 우리들만의 여름 궁전이다. 동생과 삶은 감자를 먹으며 매미소리 듣다가 소나기 쏟아지면 우산 쓰고 하늘 보다가 해 나면 흔들리는 감나무 잎 그림자를 쫓으며 여름을 난다. 누우면 온통 하늘이 내 품 안으로 들어와 세상이 모두 내 것이 된다.


풋감을 빻아 감물 들일 때 떫은맛이 빠진 말랑한 감씨를 마시멜로처럼 입에 녹인다. 매미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면, 곧이어 태풍이 몰려온다. 감나무는 비바람에 휘둘리다가 이파리와 풋감을 온통 바닥에 떨어뜨린다. 풋감을 소금물에 담가 얼마동안 두면 떫은맛이 사라져 간식거리로 먹는다. 늦가을에 딴 감을 보리 항아리에 묻어두면 겨울 내내 달콤한 홍시가 된다.


제법 감이 여물면 광목으로 만든 일복 여러 벌에 감물을 들인다. 큰 고무다라에 굵은 풋감을 쪼개 빻아 놓고 광목옷에 그것을 뭉쳐 감물이 스며들게 잘 주무른다. 감 찌꺼기 털어내어 볕 좋은 마당에 널어 일주일 넘게 말리면 갈옷이 된다. 푸르게 감물 든 옷은 볕 맞고 차차 갈옷 색이 난다. 갈옷은 처음엔 거칠다가 입을수록 부드러워진다. 갈옷은 몸에 달라붙지 않고 통기성이 좋은 데다 질겨서 여름철 농사일에 더러움도 잘 타지 않아 최고의 노동복이다. 여름이면 빨랫줄에 감물 들인 갈옷이 펄럭인다. 부모님은 여름 내내 갈옷을 입고 밭에 다녔고 그 갈옷 힘으로 우리는 자랐다.


요즘 보니 좋은 천에 감물 들여 비싸게 파는 특별한 옷이 되었지만 난 갈옷을 보면 고갤 돌리게 된다. 아무리 질이 좋다고 해도 그 옷만 보면 고단한 노동복으로밖에 보이지 않기에 그렇다. 갈옷 입고 한여름 불볕더위에 파도 파도 없어지지 않는 여뀌, 진쿨, 대우리 같은 것들을 뽑고 일하는 모습이 그 옷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작박 위 그늘에 앉아 늦은 점심으로 풋고추와 자리 구이 몇 마리, 된장 풀어 만든 오이냉국 한 숟가락 들이키고 또 일하던 어머니 아버지. 땀이 나 젖은 갈옷보다 더 그을린 아버지 얼굴이며 손톱 틈에 흙가루 없어질 날 없이 갈래갈래 갈라진 손이며, 갈옷 사이로 짐처럼 거뭇거뭇한 엄마 목이며, 땀 흘리는 시간이 날마다 갈옷에 스며들어 있어서다.

애초에 엄마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다. 갈옷이 아니라 비로드 한복을 입고 사는 꿈을 꾸었다. 입학식 날, 엄마 손을 잡고 운동장에 섰을 때, 자꾸 손으로 쓸어내리곤 했던 그 우단 한복. 할머니가 어떤 남자와 선을 보라고 꼬드길 때 사 준 한복이다.


남자는 엄마를 보러 할머니 집에 왔다가 말을 붙이고 싶어 물을 달라고 한다. 그 남자는 여자가 마음에 들었지만, 여자는 버들잎까지 띄워서 주고 싶지 않았는지 고개를 돌리고 물만 내민다. 남자는 물을 받아먹으면서 예쁘고 똑똑해 보이는 이 여자와 가정을 꾸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결혼하고 사는 내내 마음을 붙이지 못했던 여자는 어느 날 보따리를 챙기고 서울로 간다. 서울 살이를 하는 동안 찍은 작은 사진에는 흰 블라우스를 입고 고르고 흰 이를 가진 통통하게 살이 오른 차도녀의 얼굴이 남아 있다. 가난한 그 남자가 물어물어 서울로 온다. 여자는 남자와 군산으로 내려간다. 거기서 아들을 낳는다.


그렇게 우리 부모님이 되었다. 아버지는 철을 제련하는 공장에 취직했다. 제련한 철을 식히는 작업을 하는 일이다. 고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기에 다른 곳에 취직할 수 없었다. 가령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근무하는 곳 말이다. 하지만 근면하고 성실했다. 다시 삶을 시작한 그들은 부지런히 돈을 모으고 삶을 일궜다. 오빠를 낳고 몇 년이 지났을 때, 부모님이 모은 돈을 옆집 할머니의 꼬드김에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살림살이를 챙기고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다. 부모님은 머슴같이 일했다. 오빠가 네 살, 드디어 내가 태어났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밭뙈기 하나씩 늘리는 재미에 일하고 또 일했다. 엄마의 꿈은 멀어지고 비로드가 아닌 무명 한복을 입고 코고무신을 신은 엄마. 통통한 아기를 안은 엄마와 오빠가 올레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군복 안주머니에 깊숙이 담고 군대에 갔고 엄마는 혼자서 오누이를 키웠다. 아버지가 월남으로 파견될 위기에 빠지자 엄마가 백방으로 수소문하였고 다행히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어느 날 군인 둘이 마당으로 들어왔다. 내 손을 잡고 엄마는 두 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인은 달려와 나를 안자 울어버린 나. 그게 아버지와 첫 대면이었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엄마가 병원에 가서 소파수술을 하고 왔다. 소파수술이 소파에서 하는 수술인 줄 알던 나는 동생을 보지 못한다. 엄마 몸속에 있던 동생은 병원 소파로 가버렸으니까. 다음에 엄마가 진짜 배가 불러온다. 자리 깔아 놓은 방에서 산파가 엄마에게 힘주라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는 물을 데워 방으로 나르고 나는 밖에서 엄마의 비명과 아기 울음소리를 동시에 듣는다. 드디어 삼 형제가 되는 순간이다. 동네에 엄마와 비슷한 또래들은 아기를 열 명씩 낳던 시절, 우리는 가족계획의 모범가정이었다.


그즈음 엄마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예쁜 아내가 밖으로 도는 것이 싫었는지 엄마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아버지는 싫어했다. 결국 엄마는 교회도 가지 못하고 그저 일만 해야 했다. 농사일이 늘 그렇듯 세상천지가 다 일이었다.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 돌아서면 일이고 돌아서면 일이었다.


이런 날들을 얼마나 보내신 걸까


얼마나 많이 엄마는 행복한 날을 느꼈던 걸까. 생의 어느 한 부분 맑았던 날들이 엄마의 기억 속에 얼마나 자리하고 있을까.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며 어느 날 쌀알 같은 앞니가 돋아나고 두 발을 들어 발가락을 잡으며 웃을 때 엄마도 행복했을까.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아들딸을 보고 엄마는 흐뭇했을까. 고운 옷을 입고 마을 사람들과 나들이를 가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을 때 조금 행복했을까. 부녀회장을 하면서 성공사례를 발표하는 엄마는 당찬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만족하기도 했을까. 이제 엄마는 그 명석하던 판단력은 사라지고 흐려진 눈빛은 먼 곳을 바라본다.

고향에 갔을 때, 오랜만에 감나무를 찬찬히 보니, 껍질이 피부병 걸린 것처럼 벗겨지고 뿌리가 쇄골처럼 땅 위에 드러나 있었다. 이제야 그냥 서도 손 닿는 곳에 있는 판자 여름 궁전. 이제는 같이 놀아줄 어린아이도 없고, 어쩌다 참새나 까마귀밥으로 몇 개 나무에 달린 채 둔다. 바삭한 감나무 이파리들만 나무 아래 뒹굴고 있었다.


4.3 소개령으로 지게에 실려 이 집에 와서 심어진 이후 오늘날까지, 감나무는 그렇게 지나온 우리 집의 역사를 모두 저의 나이테에 새겨놓았을 터다. 어릴 적 뾰로통해진 얼굴로 괜스레 봉숭아 꽃을 툭툭 건드리며 올레를 나서는 나의 모습도 날마다 점심 구덕을 지고 밭으로 나가는 엄마, 소를 몰고 농사 연장을 짊어지고 나서는 아버지 모습도. 마당에 있는 나무들의 나이테에 저장되어 있을 터이다. 태풍이 불어 후드득 자신의 풋열매를 떨어트릴 때 아쉬움에 고개 숙이고, 사대기낭에 돼지가 매달릴 때마다 몸서리쳐지는 떨림도 새겨 놓고, 어느새 자라 같이 놀던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짝들 만나 훌쩍 떠나는 우리 세 오누이를 보내는 아쉬움도 나이테 어딘가에 새겨놓았을 것이다.


이제는 늙수그레 등이 굽은 듯 늙어가는 감나무를 보니, 어머니 아버지 얼굴이 거기 걸려 있다. 평생 갈옷 입고 일만 하던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청춘 다 바쳐버리고 살 다 발라먹고 뼈만 남은 갈치처럼 늙은 육신과 여기저기 아픈 것만 남은 채 스러지고 있다. 때 되어 감꽃 피고 열매 맺어 저를 다 내주던 감나무처럼 우리 부모님의 큰 그늘도 늘 같이 할 줄 알았는데. 그 그늘이 해가 다르게 쪼그라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낌없이 주고, 쇄골 같은 둥치마저도 자식들에게 내주는 것을 모른 채.


나이 듦은 익어가는 거라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고 계시다. 사랑하는 누군가 조금씩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힘들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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