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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Nov 07. 2023

연애 빠진 로맨스

피로하다. 역사를 모티브로 소설을 쓴다는게 창의를 요하는 것 보단 문헌 자료를 찾아보고 시대 배경을 간파해야 되는 것이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예사 일이 아닌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다 말겠지 뭐,, 그렇게 또 쓰다만 먼지 가득한 원고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식히려 가게 짬 시간에 오랜만에 넷플릭스를 훑었다. 그러다 <연애 빠진 로맨스>라는 영화가 추천작으로 떴다. 직접적으로 하는 연애는 이제 젬병이니 남이 하는 연애를 보며 설레임이라도 느끼고 싶어 영화를 들여다 봤다.


'뭐지 이거,, 재미있는데..?' 하는 생각이 초반부터 들기 시작했다. 대세 배우 손석구와 전종서가 나와서가 아니다. 너무 현실적이여서다. “왜? 모텔 왔는데 술 취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나가니까 돈 아깝냐?“하며 원초적 본능을 숨기지 않는 내숭 없는 대화와 섹스, 그리고 사내에서의 불륜과 원나잇 장면들이 성인들의 연애와 흡사 너무도 닮아 있기도 했다. 10대때는 머리로 연애하고, 20대때는 가슴으로 연애하며, 30대부터의 연애는 배꼽 밑으로까지 점점 내려온다는 대사도 이내 다가온다.


극중 잡지사 기자로 분한 손석구가 처한 현실들도 공감이 많이 됐다. '글로 흥한 자, 글로 망하리라'라는 어느 성현의 조롱 섞인 조언도 글을 또하나의 업으로 삼고있는 나로 하여금 다시 무언가를 복기케 해줬음은 물론이다.


영화 후반부에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우연찮게 손석구의 휴대폰을 보게 된 전종서의 오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파국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그 언젠가 내 폰을 보자며 떼쓰던, 그 날의 그 친구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마지못해 비밀번호를 풀어 내 폰을 건네줬다. 그 친구는 꼼꼼히 다 훑었더랬다. 친구들끼리 모인 단톡방을 보며, 가족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을 보며,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주고 받은 지인들과의 대화들을 모두 보며, 그렇게 나도 파국을 맞았더랬다. 잘잘못을 해명하거나 핑계를 댈 만한 종류의 싸움이 아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는 순간 균열이 일그러지고 상대가 상상한 모든 우주는 오해 덩어리로 변질되는 것이다.


상대가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거나 샤워를 할 땐 어떤 루틴을 가지고 있을지, 혼자 잠자리에 누었는데 문득 오르가즘이 차올라 스스로의 힘으로 쾌락을 즐기고 있진 않을지, 상상은 자유다. 남녀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지독히도 은밀한 개인의 공간에서는 그 어떤 형태의 행위가 됐건 그 자유를 만끽할테니까. 그런데 타인이 침범하는 순간, 그 자유는 도륙이 나고 이내 황폐해지며 오해들로 얼룩진다.


때론 이런 결과로 우리들 관계는 가벼우며 우스워진다. 어쩌면 그동안 만났던 이들마다 인내보단 이별의 명분을 찾으려 애쓴듯한 느낌도 든다. 책을 냈더니 책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SNS나 서점 등에 달린 댓글들을 보며 혹시나 댓글을 단 여성들과는 무슨 사이인지 캐묻는 이도 있었다. 돈까스 가게를 운영하며 서빙을 하는데, 여자 손님한테는 왜 그렇게 친절하게 대화를 건네냐며 뾰루퉁 해진 친구도 있었고 말이다.


다 좋다. 우주를 연구하고 이해하려 한 스티븐 호킹 박사도 우주보다 더 미스터리 한 존재가 여자라고 했으니 이해할 만 하다. 다 좋은데, 나는 할 말을 점점 잃어간다. 가급적 입을 다물고 조용히 하루하루를 버텨내야겠단 생각이 요즘 하루의 9할 이상을 차지한다. 내가 아무것도, 혹은 아무말도 안하면 앞서 말한 저런식의 오해를 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손석구와 전종서는 이별을 맞이한 뒤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사소하게 던졌던 대화 하나까지도 기억의 소용돌이에서 맴돌게 된다.


비 오는 날 광화문에서, 강이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시골 고택에서, 여수 앞바다의 한 포장마차에서, 휴전선 너머 북한땅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펜션에서 나눴던 대화들이 나도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알고싶지 않다. 내 기억속에만 존재하는 그 날의 모습들이 그저 좋았던 것이다. 다시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한사코 사양하겠다. 어떤 종류의 이별이든 나에겐 여전히 힘들기 때문이다.


30대부터는 연애의 감정이 배꼽 밑 은밀한 어딘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42살을 지나고 있는 나는 그 어딘가도 훨씬 지나버린 셈이다. 그나마 바란다면, 아직 버틸만한 두 다리를 지렛대 삼아 지구촌 곳곳을 손잡고 걷는 연애가 좋을것만 같다는 것이다.


몽골 속담에 '칼의 상처는 아물어도 말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라고 했다. 당신들이 이별을 예감한 듯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 말들, 첫 눈이 내릴것만 같은 오늘 같은 날은 참 아프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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