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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Dec 02. 2023

대추 한 알

대구를 다녀오니 새벽 2시. 병원 내음이 영 달갑진 않다. 대학병원 앞 번화가의 유혹에 술을 마셔도 될까, 하는 번민과 한참이나 씨름을 하기도 했다.


환자 곁을 지키는 시늉만 한 채 그대로 곯아떨어졌더니 집에 돌아온 이 새벽 잠이 오질 않는다. 나가서 좀 걸을까, 싶은 생각도 곱절로 들지만 추위에 이내 이불 속을 택한다. 천체 망원경이 있었다면 멋진 띠를 간직한 토성이라도 실컷 바라봤을텐데, 하는 푸념에 사로잡힌다.


옛 앨범을 꺼내들었다. 과거를 들여다보는 망원경을 대안으로 삼은거다. 그러다 눈에 쏙 들어온 사진 한장. 눈쌓인 철책 비무장 지대에서의 그 장면이다. 20년전 한 고참이 몰래 구해온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담은 그 날의 모습이였지 아마.


‘참 좋았었지..’ 하며 나는 또 상념에 빠져든다. 바로 코 앞의 북한군과 총대를 겨누며 조국을 지킨다는 뿌듯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흐르기도 했다.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그때 만큼은 ‘국가대표’였던 셈이다.


밤낮으로 땀 흘리며 훈련하던 그때가 그립고 좋았다. 마음은 부서지기 십상이고, 머릿속은 뫼비우스의 띠 처럼 끝없이 계속되는 지침에 현기증이 날 지경인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고약한 하루를 버텨낼 재간이 없는 오늘 같은 날은 더욱더 그 시절이 그립게 느껴진다.


그리워 하면 언젠가 만나게 될까. 시간을 건너 그 시절로 간다면, 비누를 얼굴에 덕지덕지 바른 채 깨끗이 세수를 하고, 조금더 밝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어야겠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고 했다. 그 안에 천둥 몇개, 태풍 몇개, 벼락 몇개를 간직해야 비로소 완연한 대추로 빛을 바라게 되는 거 였다.


언제쯤 나아질까. 새벽 5시를 향해간다. 아침이 오면 나아질까. 창 너머로 환경 미화원 분들의 생채기를 시작으로 아침을 여는 사람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한다.


대추가 점점 붉어지는 찰나의 모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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