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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Jan 26. 2024

’110‘이라는 숫자로부터

사상 첫 아시안컵 16강에 진출한 팔레스타인. 선수들의 팔뚝엔 '110'이라는 숫자가 적혀있다. 이스라엘의 학살이 시작된지 110일째라는 의미. 선수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자국 국민들에게 자그마한 희망을 주려고 사력을 다해 뛰었고, 결국 16강 진출이라는 기적과도 같은 쾌거를 이뤄냈다.


어제 한국은 피파랭킹 130위인 말레이시아와 졸전 끝에 3:3으로 비겼다. 한국의 피파랭킹은 23위. 무려 100계단 이상 차이가 나는 나라다.


한국은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손흥민을 비롯해 세계 최강 바이에른 뮌헨의 김민재, 새로운 축구황제 음바페가 속해 있는 PSG의 이강인 등 세계 최고의 클럽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선수들이 포진해 있는, 그야말로 역대급 대표팀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런데 비겼다. 경기가 끝나자 우리나라 언론과 국민들은 기다렸다는 듯 들고 일어났다. 우선 감독을 물어뜯고, 골을 못넣은 선수들을 비아냥 대며 그들의 가족까지 물어뜯기 시작했다. 비난을 넘어 조롱과 멸시에 가까웠다. 그러자 참다못한 캡틴 손흥민이 언론 앞에 나섰다. 제발 선수들 비하를 자제해 달라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였던 것 같다. 그때 잠시 스포츠 부서에서 수습으로 일을 할 때였는데, 당시의 언론사 분위기도 그러했다. 경기에 지면 기다렸다는 듯 물어 뜯는거다. 국민들은 하나가 되어 물어뜯는 기사에 공감하며 환호하기도 한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결승전으로 이끌었던 말총머리 슈퍼스타 '로베르토 바조'는 브라질과의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실축을 하는 바람에 조국에서 역적이 됐고, 그 이후로 선수 생명이 실질적으로 끝나버렸다. 동시에 콜럼비아의 한 선수는 그 대회에서 자살골을 넣는 바람에 고국으로 돌아가 열성 팬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반대로 코트디부아르의 국민 영웅 '디디에 드록바'는 월드컵에서 골을 넣고 조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월드컵 기간만이라도 멈춰 달라는 세레머니를 펼쳤는데, 기적처럼 전쟁이 멈췄다. 이 후 우리는 그를 '드록신(神)'이라고 칭하게 됐다.


축구. 말 그대로 총성 없는 전쟁이다. 경기 결과에 따라 환희와 슬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우리 삶에 너무 깊숙히 들어와버린 축구는 이제는 뗄래야 뗄 수도 없게 됐다.


공 하나만 있으면 온 동네방네 운동장 되어 저 멀리서 엄마가 저녁 먹으러 들어오라며 소리 칠 때 까지 차고 뛰어놀았던 그 시절. 서로 팀을 짜 동네 월드컵 대회를 열어 순백의 자웅을 겨뤘던 그 시절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축구.


우리 국민들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을까. 팔레스타인 선수들의 팔뚝에서 나는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는데.


때로는 많은 것이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여지를 뒀으면 좋겠다. 우리가 사랑하는 축구의 응원 방식이, 때로는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다시한번 응원하고 싶다. 아시안컵 우승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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