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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Jan 31. 2024

십년이 지나도

어젯밤 12시가 다되서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집에서는 웬만하면 폰을 만지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에 폰은 항상 작은 방 모퉁이에 충전을 해놓는다. 혹시라도 습관적으로 들여다볼까 싶어 애초에 멀리 두는거다. 급한 용무는 전화오겠지뭐, 하는 생각으로.


좀처럼 울릴 일이 없는 벨소리가 어제는 어찌나 반가웠는지 나는 작은 방으로 뛰쳐가 폰을 집어 들었고,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보였다. 속으로 ’여자면 좋겠는데,,(ㅎㅎ)‘ 하는 생각으로 얼른 받았다. 웬 걸, 여자다. 상대는 대뜸 ’임기헌 폰 맞아요?‘ 하며 물어온다. 맞다고 하자 그제야 누구인지 밝힌다. 10년전 즈음 서울에서 알고 지낸 두 살 터울의 누이였다.


반가웠다. 당시 이 누나는 한의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중국으로 유학을 가기전에 영어(토익) 점수가 필요하다고 해 공부를 도와주면서 친하게 지내게 됐다. 어쩌다보니 공부는 뒷전이 되고, 만나면 음주가무를 즐기게 되는 탈선의 나날들도 많았던 걸로 기억이 난다. 같이 청계산도 자주 올랐고, 인천 앞바다에 바다 낚시를 하러 갔다가 배 안에서 소주만 진탕 마시고 온 모습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런 누나가 어엿한 한의사가 됐다고 한다. 중국에서 돌아온지는 2년 정도 됐다며. 그러더니 말나온 김에 서울에 있으면 소주나 한잔 하자며 10년전의 어느 날 처럼 스스럼 없이 말을 건네온다.


”응? 지금??“

”응!!“

달빛 너머로 들리는 누나의 목소리가 10년전 처럼 청아하다.


맞다. 누나는 아무것도 모르겠구나.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온 것도, 지금 돈까스 장사를 하는 것도, 새까맣게 모르겠구나.


누나한테는 대강의 상황을 설명하고, 내가 서울에 자주 가니까 조만간 만나서 밤새 술한잔 하자고 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더 통화를 하고 끊었다. ”나 이제 침 맞을 걱정은 없겠네! 그것도 미녀 한의사 한테. 하하~ 연락줘서 고마워 누나! 조만간 봐“ 하는 인사를 건네며.


10년의 세월을 생각해 본다. 10년 전 나는, 10년 뒤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도 우리는 왜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까. 하물며 나는 어떻게 10년전 누나와 함께 했던 작은 일상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는걸까. 엄밀히 말하자면 누나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10년 사이 나는 한번도 누나를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그런데도 함께한 모든 순간을 기억할 수 있다니.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을까. 잊기 싫은 순간들이 우리가 모르는 내면에 가득한 걸까. 오랜 시간이 흐르며 잊혀졌다고 생각한 모든 기억의 조각들이 서로를 밀어붙혀 수면위로 이끌어 내는 순간은 이렇게 불현듯 찾아오는걸까.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을 모아 목재를 수집하고, 일을 분배하고, 명령을 내려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들이 광활하고 끝없는 바다를 동경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어쩌면 나는 기억의 파편을 모으기보다 동경하고 있었던건 아닐까. 광활하고 끝없는 그 어딘가의 그것까지.


슬픔은 아름다움을 낳는다고 했다. 슬픔으로 얼룩진 나의 불혹의 시간들이 10년 뒤 지천명 즈음엔 아름다움으로 기억되길, 바라마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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