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 실컷 놀고 먹다가 아버지를 그만 잊어 버리고,, 다늦게 소주 한잔 드리러 찾은 납골당. 오랜만에 찾아서인지 그 사이 하늘 나라 친구들은 곱절로 늘어난 듯 보인다. 명절을 맞아 납골당 친구들 모두가 꽃단장을 새롭게 한 모습도 눈에 띈다.
근데 이상하다. 우리 아버지 납골함은 나 말고는 찾는 이가 없는데, 예쁜 꽃이 놓여있다. 누구지..? 가족들한테 물어봐도 다 아니라고 한다. 희한한 일이다. 누굴까.
볼썽사납고 자꾸 반복된 얘기 같아 망설여지지만, 과거에 이혼을 하고 한달 뒤쯤 혼자 납골당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에도 웬 편지 한장이 놓여 있길래, 누군가 싶어 꺼내 읽어봤다.
전처였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본 적도 없고, 누군지도 모를 며느리였던 셈이다. 편지에는 힐난이나 아쉬움의 표현은 찾아볼 수 없었고, 되려 말미에 ‘아버님, 기헌 오빠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되서 너무 죄송합니다.’ 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아팠다. 그렇다고 다시 연락한 적도 없지만, 그 친구와 처갓집 식구에게 만큼은 평생 속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그때 했더랬다.
영화 <그랑블루>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2년 전에는 그녀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이름조차 생각나질 않아.”
내 마음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거란 생각이 든다.
꿈을 꾼다. 농부가 된 나는 하루종일 밭을 메다 저 멀리서 새참을 정성스럽게 준비해 온 색시를 발견하곤 목청껏 부른다. 색시는 제 서방을 목놓아 부르며 빠른 걸음을 재촉해 달려온다. 둘은 봄바람을 맞으며 우연히 찾아온 봄날의 순간을 함께 한다. 내가 사는 동안 한번도 이뤄볼 수 없는 장면이 될것 같아 이 좋은 봄날 꿈으로 남겨본다.
긴 연휴가 지나고 나니 노곤하다. 산비탈의 결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봄의 전령처럼 따스하게 느껴진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나보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따스한 햇살은 봄이 우연이 아님을 확신케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