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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Feb 28. 2024

누군가를 사귄다는 것에 대하여

과거 유학 시절에 현지에서 사교 모임을 더러 나갔더랬다. 특별한 건 없었다. 같이 이야기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하는 식이였다. 그러다 현지인 친구 하나와 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땐 나도 20대 청춘이였으니, 감정의 이입은 깃털처럼 자유롭게 흩날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더늦기 전에 고백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나라는 “나랑 사귈래?”하는 적확한 표현이 있지만,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나는 선뜻 생각이 나질 않았다. ‘I love u’는 너무 과하고.


그래서 기억하기로는 ‘I am just feeling some emotion from u’ 라는 표현을 썼던 것 같다. 나보다 한 살 아래였던 그 친구는 웃음을 보였다. 그땐 나도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서 젊은 혈기에, 그리고 술의 힘을 빌려 고백을 한건데, 그 친구 입장에선 웬 동양인이 꼴값을 떨고 있는 모습으로 비춰졌을 수 있었을거란 생각도 든다.


암튼 그렇게 만나게 됐다. 이 후 같이 학교를 마치고 영화도 보고, 공원에서 산책도 하며 우리나라 연인들과도 별반 다를 바 없이 다정하게 만났더랬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자연스레 만남은 정리가 됐고.


지금에 와서 그 기억이 나는 이유는 누군가를 '사귐'에 있어서 온도차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다. 우리나라는 이성과 사귀는 순간 구속의 길로 접어드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기까지 일거수 일투족 모두를 보고해야 된다. ‘잘잤어?’부터 시작해 ‘잘자’까지가 서로의 임무가 되는거다.


삼시세끼는 뭘 먹는지 사진을 찍어 인증을 해야하며, 뜬금없이 보내온 사진엔 간드러진 표현으로 환호도 해줘야 함은 물론이다. 100일부터 생일, 각종Day 까지, 1년 내내 기념일이 아닌 날을 찾기도 힘들다.

그동안 잘 만나온 ‘여사친’과는 아무 이유도 없이 만남을 정리해야하며, 동창회를 비롯한 이성이 뒤섞인 회식 자리도 가급적 참석을 피해야 된다. 그래야 평화로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런 물음이 있었다. 여자친구랑 헤어지는 이유가 도대체 뭔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적이 없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헤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런거였다. 구속되기 싫었던 거다. 의무적으로 통화하거나, 연인 사이에 갖춰야 할 형식적인 틀에 갇혀 서로가 피곤해지는게 싫었던 것 같다. 호주에서 만났던 그 친구처럼, 쿨한 사이가 되고 싶었다. 남사친, 여사친과 가벼운 포옹은 물론 볼키스도 나눌 수 있고, 깻잎 논쟁이라 할것도 없이 깻잎 한장을 덜어내 여사친 밥숟갈 위에 나눠 줄 수도 있는 그런거다.


우리나라 방식대로 연락과 표현의 횟수가 연인간 사랑의 온도를 대변한다면, 나는 앞으로 아예 수화기를 놓지 않겠다. 그럼 당신들이 그토록 바라는 영원한 사랑이 되는건가.

 

내가 아는 사랑은 흘기듯 지나치는 ‘응’ 한마디에도 마음을 알 수 있으며, 굳이 때마다 무얼 하는지 기계적으로 연락을 안하더라도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런건데. 1년에 단 한번 엄마에게 쓰는 손편지 처럼, 사랑은 표현의 빈도나 형식이 증명할 수 없는 영역도 있는건데 말이다.


과거의 한 친구는 연인끼리는 잘 땐 무조건 같이 자야된다는 철학이 또렷했더랬다. 나는 가끔은 혼자 조용히 책을 좀 보거나 글을 쓰고 싶고, 잠이 안 올땐 영화도 한편 보고 싶은데, 그 친구와 만나는 동안엔 혼자 있을 겨를이 없었다. 밤만 되면 불을 꺼버리고 같이 잠자리에 누워 팔베개를 해줘야 잠이 드는 식이였다.


늘 처음이야 좋다. 그런데 그 마음이 오랫동안 유지되려면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보통의 생각 이상으로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그건 쉽지가 않다. 우리가 헤어지고 이혼하는 이유는 그 상황이 켜켜히 쌓여 균열이 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자유가 동반되면 좋을 일이다. 다만 그 자유에는 무한한 책임이 따른다. 내가 여자친구, 혹은 전 아내가 이성친구와 밤늦게 만난다해도 아무렇지 않게 내버려뒀던 이유다. 무한한 자유를 줄테니, 남녀 사이에 불경한 일이 벌어지면 그에 맞는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내가 말한 자유와 책임의 경계는 상식에 기인한다. 자유를 줬더니 남사친들과 새벽 5시까지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걸 우리는 상식이라 부르진 않을것 같다.


이젠 호탕한 친구가 좋다. 누군가와 거창하게 사귀는건 이만하면 됐다. 또다시 서로를 어항속에 가둬놓고 '사귐'놀이를 하다간 질식을 넘어 숨이 멎을지도 모르겠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쏟아지면 잠을 자는 것 처럼, 뭇 이성과 만나 서로 혹하는 감정이 생기는 날엔 하룻밤 섹스도 괜찮다. 합법적이고 도덕적 경계만 넘지 않는다면 뭐가 문제랴. 솔로의 특권이니 다 좋은거다.


‘라쇼몽 효과’라는 말이 있다. 일본의 영화 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영화 ‘라쇼몽’에서 유래된 말로, 기억의 주관성에 대한 얘기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당사자마다 서로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내가 기억하는 사랑의 흔적들이 곡해되진 않았으면 좋겠다. 작은 어항안에서 서로 사랑했으니까, 같은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면 되는거다. 라쇼몽 효과가 사랑의 영역 만큼은 비켜갈거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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