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랑 둘이 술을 한잔했다. 매번 조카들이나 엄마, 혹은 매형과 함께 했었는데 저마다의 사정으로 모처럼 둘이서만 자리를 하게 됐다. 얼마즈음 지나고 취했던 걸까, 나는 엄마가 이 세상에 없는 이 후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안동을 뜰거라는 이야기부터. 뉴질랜드로 갈지, 제주도로 갈지, 아니면 유일하게 하나 남은 가족인 누나네가 있는 포항으로 갈지, 셋 중 한 곳으로 가서 정착을 할 거라고 했다. 지금 있는 아파트와 차, 부동산, 투자상품들을 다 팔아치우면 경제적인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최소한의 밥벌이는 해야되니까 어디서든 돈까스 장사는 할테고, 책을 쓰고 학생들에게 논술이나 영어를 가르치면 어떨까도 싶었다. 쉬이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현실 그 너머를 생각하니까. 안동에 머물 일은 추호도 없다고 했다. 하루가 다르게 우경화 되고있는 도시에서 산다는 건, 제 아무리 인내가 깊다 하더라도 쉽지가 않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12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아침마다 아버지를 생각한다. 눈을 뜨는 순간 자연스럽게 아버지 생각이 든다. 그날의 슬픔이 뇌에 고정이 된거다. 떨쳐내려해도 떨쳐지지가 않는다. 우리가 수포자라도 원주율이 3.14임을 결코 잊지않는 것처럼, 나는 당신을 아마도 죽는 그날까지 잊지 않으려나보다.
그럼 엄마의 사후에 나는 어떡해야될까. 나는 이번 서울여행에서도 엄마가 곁에 있는데도 계속 엄마가 그리웠다. 모르겠다. 자꾸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 군말 없이 아들 하나 의지한 채 한 평생 살아온 우리 엄마의 뒷모습은 점점 작아지는 듯 보였다. 많이 지친거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당장 내일 병이 찾아올 수도 있는, 그런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거다.
많은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 나도 그렇게 이별하면 되는걸까. 이별하는 날 장례식장에서 잠깐 울먹이다가 금세 또 현실에서는 잊어버리는, 나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참 편할텐데 왜 안되는 걸까. 장례식장에서도 유튜브만 보는 호기를 부리며, 3일장이 끝난 뒤에는 골프를 치러 갈 생각에 설왕설래 한다면 내 삶도 얼마나 편해질까.
삶의 질량은 모두가 동일할텐데, 누군가의 질량은 왜 더 무거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하물며 그 질량을 왜 나눠가지려 하지는 않는지.
82년생인 나는 시대의 혜택을 받아 가정과 사회에서 그 질량을 조금이나마 덜어줬는데, 그 옛날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무게는 어떻게 덜어줘야할까.
우리 엄마는 얼마전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가 그립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우리 엄마의 엄마니까.
"아이 먹게 우동면 잘게 짤라서 주세요"
"아이 먹게 돈까스 식혀서 보내주세요"
"아이 먹게 소스에 땅콩가루 다 빼주세요"
"아이 먹게 계란후라이 하나만 해서 주세요. 리뷰 써줄게요"
"아이 먹게 어린이용 숟가락, 포크, 젓가락도 챙겨보내주세요"
"아이 먹게 미지근한 물한잔 같이 보내주세요"
장사를 하며 수시로 듣는 요청사항들이다. 저 요청사항을 들어주지 않았다가는 별점과 리뷰테러가 이어진다. 왜 저러는 걸까. 세상의 엄마들에게 진심으로 묻고싶다. '왜 그러시는 거에요?'
우리 엄마도 요즘 세상에 나를 낳았다면 저랬을까? 아닐거다. 우리 엄마는 내가 놀이터에서 흙먼지를 마시고 들어와도 '그거 조금 먹는다고 안죽어 이놈아'라고 하니까. 말벌에 물리거나 축구를 하다가 뼈가 보일 정도로 무릎이 까져도 '빨간약' 하나로 모두를 해결해줬다.
그래서 나는 우리 엄마가 좋나보다. 오로지 나, 그러니까 우리 아이만 생각하는 암약한 엄마가 아니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 엄마를 생각해 나도 요청사항을 하나 적어본다.
"빗길인데 배송 천천히 오셔요. 저희 하나도 안급합니다.^^ 고생하십시오."
내가 엄마에게 배운 사랑은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무엇으로 가족의 안부를 묻고 있는지, 그리운 추석이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