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그러니까 계절적 배경은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오늘같은 가을이면 좋겠다.) 전세계 무수한 나라 중 단 한 곳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책을 볼 수 있다면 어느 나라를 택하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영국을 택하겠노라, 하고 답을 하겠다.
셰익스피어를 따라 런던을 걷고, 햄프셔에서 제인 오스틴의 발자취를 엿볼 것이다. 찰스 디킨스를 따라서는 빅토리아 시대의 모순을 다시한번 들여다 볼 작정이다. 아서 코난 도일은 어떨까. 그가 창작해 낸 <셜록 홈즈>의 추리력은 서너번을 읽어본들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는 걸. 조지 오웰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작심이라도 한 듯 <동물농장>에서 소련 정권의 전체주의와 권력의 부패를 풍자하며 영국 소설의 정점을 찍었더랬지. 이뿐일까.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 같은 판타지도 빼놓을 수 없는 ’문학의 나라‘ 영국이 되겠다.
영국은 과거에 두 번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회사 출장, 또다른 한 번은 여행이었다. 혈기왕성 했던 그 젊은 날엔 문학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있었겠냐만, 마음의 여유가 조금은 응축된 요즘은 영국과 문학을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게 됐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작가 모두가 영국 태생이라니.
비록 돌싱이라는 씻지못할 낙인이 찍힌 채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아가고 있지만, 내 나이 오십즈음엔 다정한 여자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산과 바다, 그리고 태양계의 행성들을 사랑했으면 좋겠고, 산중턱에서 막걸리 한잔 정도는 할 줄 안다면 더할나위 없겠다. 특히 오늘처럼 온종일 비가 내리는 날엔 허물없이 연락해 소주 한잔 하자고 말하고 싶고, 허락한다면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마음 놓고 만나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러다가 함께 영국을 가게 된다면 런던 국회의사당에 위치한 빅벤 앞 잔디광장에 나란히 누워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을 다시한번 읽고 싶다. 그녀를 만난 희극의 순간에 읽는 비극은 어떤 기분일지. 읽다가 잠이 쏟아지면 템즈강을 따라 걷는거다. 난 얘기하고 넌 웃어주고. 눈이 마주칠 때엔 살짝 입을 맞추며. 저녁은 고딕 양식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피시 앤 칩스를 안주 삼아 와인 한잔 어떨까. 배를 든든하게 채운 후에는 리버풀과 맨시티가 맞붙는 프리미어 리그를 직관하러 가는거다.
그래, 다시 영국을 찾는다면 그래야겠다.
여기 좋은 시가 한 편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거칠어진 사람들 틈에서, 온기가 메마른 세상에서, 무엇보다 오늘처럼 가을비가 쏟아지는 날 읽기에 좋으리다.
’비가 온다/ 너를 생각한다/ 우산이 하나뿐이던 날/ 너의 어깨가 반쯤 젖어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이/ 내 전부였다는 걸‘
빗소리에 귀기울인 채 지난 삶속에서 다정했던 한 사람을 부디 떠올려 보시라, 그리고 좋은 밤 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