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가 내리던 날

by 임기헌

"굿바이 미스터 션샤인, 독립된 조국에서 씨 유 어게인" 유진 초이의 내음이 가득한 그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풀 냄새가 한층 짙게 풍겨왔다.


이른 아침 볕이 들 땐 보슬비가 잠깐 대지를 적셨더랬다. 여우비다. 아주 먼 옛날, 여우를 너무도 사랑한 구름이 여우가 시집가던 날 햇살도 가리지 못한 깊은 슬픔으로 비가 되어 눈물을 흘렸다는데에서 유래했다. 볕이 난 날 흩내리는 여우비는 그래서 구슬프다.


여우비가 내리던 날 서양의 어느 작은 마을에 살고있던 괴테는 첫눈에 보고 반한 마리아네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끝이 갈라진 것처럼 보일 뿐, 반듯한 한 장 은행나무 잎사귀를 편지에 동봉해요. 나는 당신과 이처럼 둘이 아닌 한 몸임을 느껴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되지만, 진정한 신사는 숙녀가 간절히 필요로 할 때 떠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남아 있을까, 싶기는 하다.


필경 그리움이 자욱해 마다않는 계절이다. 가을이다. 그런 결기와 인내, 그로부터의 성숙된 사랑이 그리운 시기이기도 하다. 누구나가 하는 시답지 않은 보통의 사랑 말고, 이젠 목숨을 건 사랑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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