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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경철 Jul 21. 2022

이 결합이 지닌 숭숭 난 구멍들을 그려보았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 중에서(마지막 페이지)

‘너희 아빠랑 조만간 연명치료 거부한다는 신청 하러 갈 거야. 연명치료 그까짓 거 받아서 뭐해.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시며 자주 가시는 문화센터에 일하러 오시는 80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셨다. 그 할아버지는 이미 연명치료 거부를 신청했고 또 자신이 더 살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먹으려고 수면제를 100개 모아 놓으셨다고 한다. 엄마가 그 할아버지에게 수면제 50알만 주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펄쩍 뛰며 안된다고 하더라며 킥킥거리며 웃으셨다. 나는 뭐 그럴 것까지 있냐고라고 했지만 엄마는 그런 생각 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셨다.      


올리브 키티리지라는 소설을 읽었다. 올리브의 40대에서 70대까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장성한 아들이 자신을 떠나 먼 타지로 가기 전까지, 그러니까 소설 중반부까지는 올리브의 삶의 이야기가 소설의 중심이 아니다. 올리브 남편, 이웃의 이야기가 소제목이 붙어 단편처럼 나온다. 소설은 중반부를 넘어서야 올리브를 주목한다. 한창 아이를 키울 때는 올리브는 가족과 일에 묶여 있었고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선량하기만 한 남편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다가 자신의 인생에 소중하다고 여긴 것들을 상실하고 나서 올리브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과거를 추억하기도 하고 자신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고 자문해 보기도 한다. 70대 중반이 된 올리브의 유일한 걱정은 매일 운동을 해서 더 오래 살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올리브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개인이기에 특별하기도 하지만 나의 엄마, 또는 내가 될 수도 있기에 평범하다. 그래서 나는 올리브에게 마음이 쓰였다. 내가 처음 집을 떠나 살던 날 엄마의 눈물이 기억났다. 아빠와 너무 맞지 않다고 항상 불만을 토로하시지만 아빠 없이는 못 살 거 같다는 엄마의 말도 생각났다. 소설 말미에 올리브는 동년배의 아내를 잃은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삶은 그녀에게 다시 한번 손짓한다. 

    

비록 늦었을지라도 자신을, 소중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올리브가 나는 너무 반가웠고 큰 소리로 응원해 주고 싶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우울해하기보다 엄마의 유쾌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금을, 오늘을 감사하기로 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 중에서(마지막 페이지)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 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그렇기에, 지금 그녀 곁에 앉은 이 남자가 예전 같으면 올리브가 선택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그도 필시 그녀를 택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 둘은 이렇게 만났다. 올리브는 꼭 눌러 붙여놓은 스위스 치즈 두 조각을, 이 결합이 지닌 숭숭 난 구멍들을 그려보았다. 삶이 어떤 조각들을 가져갔는지를. 그녀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한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 좋은 이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 베리를.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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