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 중에서
‘지금이 좋을 때에요, 나중에 되어 봐요, 아이 크는 게 서운하다니까요.’ 둘째가 아장아장 걸을 때 누군가 나에게 해 주었던 말이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를 잡으러 다니느라 지쳐있던 시절이라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흘려들었는데, 요즘은 그 말을 체감하고 있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둘째는 팔다리도 제법 길쭉길쭉해지고 통통한 볼살도 빠져 아기티를 벗은 모습이다. 아이가 자라고 있는 것은 분명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기뻐할 일이지만 아쉽고 서운하고 아까운 마음도 무시할 수 없다.
저 멀리서 아빠에게 안겨 있는 아기가 보인다. 아빠의 두 팔에, 가슴에, 딱 그만한 크기다. 작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피부, 젖내 나는 아기의 채취가 떠오른다. 요즘은 기저귀 한 아기의 엉덩이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기저귀를 갈 때 손과 발을 동시에 공중으로 올리고 흔들어대던 모습, 허벅지에 살이 올라 접힌 살을 펴가면서 닦아주던 것이 생각나서 실실 웃음을 흘리게 된다.
신형철 평론가는 그의 산문 ‘느낌의 공동체’에서 시인 문태준을 ‘다정증(多情) 환자’라고 부른다. 책에 소개된 문태준 시인의 ‘수런거리는 뒤란’을 찾아 전문을 읽어 보았다. 과연. 시에 나오는 모든 단어에 다정함이 묻어나서 읽으면 읽을수록 내 마음도 다정해지는 것 같다.
내가 문태준 시인의 시를 읽고 공감하고 감탄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다정하게 보는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무뚝뚝하고 감성이 없는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런거리는 뒤란 (문태준)
산죽(山竹) 사이에 앉아 수탉이 웁니다.
묵은 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애처롭습니다
구들장 같은 구름들은 이 저녁 족보만큼 길고 두텁습니다
누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뒤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 중에서
‘몰인정의 시대에 그의 시는 갸륵하다. 그의 다정(多情) 때문이다. 이조년은 “다정도 병인 양하여”라 했다. 병 맞다. 이를 다정증이라 부르려 한다. 문태준은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다정증 환자다. 이 환자가 우리 딱한 ‘정상인’들의 가슴을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