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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경철 Jun 30. 2023

아버지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줌파 라히리의 ‘길들지 않는 땅’ 중에서

우리가 한창 클 때, 그러니까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 아빠는 주중에는 늘 회식이나 야근으로 퇴근이 늦으셨고 일요일은 오전 늦게까지 늦잠을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목욕탕을 다녀오셔서 하루 종일 야구중계를 보시는 게 일과였다고 한다. 오 남매의 독박육아에 끝없는 집안일과 우리들 뒤치다꺼리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일요일에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아빠가 얼마나 얄미웠는지, 엄마는 아줌마들끼리 남편 흉보듯 나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줌파 라히리의 ‘길들지 않은 땅’은 중년이 된 딸과 은퇴한 아버지 두 사람의 관점으로 교차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모범적인 가장이었지만 친근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아버지가 어려웠던 딸, 몇 년 전 아내를 잃고 혼자 살고 있는 아버지와 가정을 이루고 엄마가 된 딸, 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아버지와 아버지를 홀로 두는 것이 불편하지만 함께 사는 것도 내키지 않는 딸.

딸이 새로 이사하게 된 집에 처음으로 오신 아버지. 두 부녀는 그렇게 잠깐동안 함께 지내게 된다. 줌파 라히리의 글은 아버지와 딸의 관계, 가족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시작으로 인생에 대해 생각으로 이끈다. 작가의 글은 따뜻하지만 차갑고 쓸쓸하다.  


책의 내용 중에 아버지가 손자에게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고 딸은 자신의 아버지가 사랑에 빠졌을 때의 표정을 보게 되고 잠깐 동안 자신의 아들을 부러워한다.      

해외에 살 때, 아이들 방학으로 한국에 오면 친정에 한 달 반에서 두 달씩 머물렀었다. 당시 대여섯 살, 서너 살이었던 아이들은 거실에서 할아버지와 자주 어울렸다. 함께 일일연속극을 보기도 하고 만화영화를 보기도 하면서. 그리고 할아버지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있다 잠이 들기도 했다. 손주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은 낯설었다. 그리고 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 모습이 바로 사랑에 빠진 모습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 내가 느꼈던 뭔지 모를 감정이 어쩌면 부러운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아빠 출근시간이 다가오면 우리를 사정없이 깨우시곤 했다. 엄마 성화에 못 이겨 발을 질질 끌고 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비몽사몽간에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했다. 그런 우리 모습을 보고 아빠가 웃으셨는지 좋아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종종 천 원짜리를 꺼내 주시곤 하셨다.      

이제는 나도 엄마처럼 아이들에게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게 한다. 아이들을 보는 남편의 얼굴근육은 말랑말랑 유들유들해진다. 늦게 들어와서 아이들 자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는 남편의 뒷모습을 본다.

내 기억에는 없다 할지라도, 자는 나의 모습을 보며, 아침에 부스스한 얼굴로 인사하는 내 모습을 보며, 아빠도 남편과 같은 표정을 짓지 않으셨을까.

     


줌파 라히리의 ‘길들지 않는 땅’ 중에서       


아카시가 아버지와 처음 같이 자던 밤, 루마는 아카시가 잠이 들었나 보려고 아래층에 내려갔었다. 방문 밑으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나오고, 『초록색 달걀과 햄』을 읽어주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이 이불속에 누워, 베개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대로 책을 가운데 놓고는 아버지가 읽으면 아카시가 책장을 넘기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가 책의 내용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아버지로선 평생 처음 하는 일이었다. 그는 떠듬떠듬, 문장마다 멈추어가며 읽었는데, 말할 때와는 달리 책 읽는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고조되었다. 그래도 애쓰는 게 고마웠고, 문 앞에 서서 책 읽는 소리를 듣던 루마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노크를 하고 아버지에게 아카시 잘 시간이 지났다고, 불을 꺼야 잔다고 말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만두고 2층으로 올라가려 몸을 돌리는 순간, 잠시였지만 자기 아들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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