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로스의 ‘울분’ 중에서
한 손으로 거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두께의 책을 손으로 잡자마자, 첫 글을 읽자마자, 그리고 필립로스의 글이기에, 나는 이 책을 한번 열면 읽을 때까지 닫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린 세 권의 책 중 가장 나중에 읽기로 정했다. 맛있는 것을 아껴먹는 심리랄까….
글은 코셔 정육점(유대인의 율법에 맞는 정결한 고기를 파는 정육점)을 하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외아들 마커스의 1인칭 시점이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자신을 죽게 한 자신의 선택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나는 늘 나 자신을 밀어붙였다. 늘 어떤 목표를 추구했다. 부모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주문을 전달하고, 닭털을 뽑고, 도마를 닦고, A를 받았다. 오직 공부에만 집중하려고 클럽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죽지 않으려고 ROTC에 아주 진지하게 참여했다.’ (필립로스의 ‘울분’ 중에서)
자신의 아들이 죽을까 봐 겁을 먹은 나머지 미쳐버린 아버지를 피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으로 옮긴 마커스는 그곳에서 잘 적응하지 못한다. 학업과 학비에 대한 부담으로 친구를 사귈 여유가 없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 ‘무교’라고 이야기한다. 기독교식 채플에 마흔 번 참석하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는 학교제도에 강한 반감을 가진다. 처음 사랑하게 된 여자아이와의 문화적 괴리감, 갈등은 마커스의 감정을 더욱 몰아붙여 ‘울분’의 상태로 서서히 이끌어 간다.
기독교 백인남성 중심의 미국사회 살았던 유대인이라서, 한국전쟁으로 징집의 걱정을 가지고 살던 불안한 청년이라서,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 자신의 감정보다 의무와 책임이 먼저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마커스의 ‘울분’을 설명하기는 아쉽다. 그런 시대적, 배경의 특수성을 가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어떤 부분에 불합리함을 느끼고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저항하고 휘감아 치는 감정에 몸을 맡겨버린다. 그래서 나는 마커스에게 이입할 수 있었고 동감할 수 있었다. 그를 죽음으로 이끈 선택의 과정들을 비난할 수도 없고 판단할 수도 없다. 나도 나를 어쩔 수 없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에.
필립로스의 ‘울분’ 중에서
그랬다면 그의 교육받지 못한 아버지가 그동안 그에게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려 했던 것은 나중에 배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