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산책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린다. 지금 내 앞에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뒤를 돌아보니, 나보다는 젊은 노인 한 분이 따라오고 있다. 그분 주머니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 핸드폰은 아닌 것 같고 노래 재생기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대동강 을밀대가 어떻고 하는 가사로 봐서 아주 오래된 노랫가락이다.
잠시, 소리가 저렇게 커야 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 사정을 알 것 같다. 귀가 안 좋은 거다. 자신이 못 들으면 들을 수 있을 때까지 크게 할 수밖에 없다. 기준을 항상 자신으로 삼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몰고 가는 건 무리다. 신체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아침에 이런 음악을 들으며 걷는 취향도 문제 삼을 수 없다. 공감까지는 곤란하지만 그래도 취향은 존중해야 한다.
나는 머리가 온통 하얀색으로 변해버린 사람이다. 미용실 원장은 나 같이 머리 전체가 하얀 사람은 아주 드물다고 했다. 희귀하다는 게 우쭐할 일은 아니지만, 희소가치(稀少價値)란 항상 액면가 이상을 상회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환상(幻想)의 부작용인지 나는 머리카락 색으로 노소를 가리는 버릇이 있다. 위에 쓴 데로 ‘나보다는 젊은이’라는 기준은 그런 내 인식에서 생겨난 편견이다. 머리가 반백이면 나는 서슴지 않고 ‘어린 것이 까불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어제 아침 일이다. 벤치에 앉아서 메모하고 있는데, “젊어서는 공부를 잘하셨든 모양이네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나보다 젊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대뜸“연세가 어떻게 되세요?”했다.
“내년이면 아흔이요.”
그렇다면 ‘어린’ 게 아니다. 나보다 열네 살이나 위인 게다. 저 할머니는 철딱서니가 없어서 머리가 까말까?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했다.
다른 듯 같은 우리는 이렇게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나는 나 이외의 모두를 어린 것들이라 생각하고, 주위 사람은 나더러 참으로 곱게 늙었다고 생각하며 같은 공간에서 숨 쉰다. 서로가 몹시 튀는 상태이니 겉으로는 태연해도 어찌 어려움이나 아픔이 없을 수가 있겠냐.
앞으로 가능하다면 이렇게 사는 모습을 글로 그리고 싶다. 자신은 아직 건재하다고 믿는데 곁에서는, 먼 별나라에서 튕겨 나온 화석 정도로 취급하는 데서 생기는 애환 같은 거 말이다.
돈키호테는 항상 자신만만했던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객관적인 시선의 의미 같은 것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내 아내는 항상 나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이 인간이, 저 상태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이라는 낯빛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은 어차피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