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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진채 Sep 11. 2023

안쓰러운 유산(遺産)

아내의 화장대 위에 웬 약병 하나가 보였다. 무심코 들여다봤더니 뚜껑에 손글씨로 ‘변비약’이라 적혀 있다. 언제 사 온 약이냐고 물었더니 모른단다.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있어서 버릴 요량으로 꺼내 놓았단다. 

슬며시 들고나와 내 방 약상자에 넣어뒀다. 얼마 전에 그런 증상의 약을 사다 먹었는데 약을 먹을 때는 괜찮더니 약 기운이 빠지자 다시 도지는 것 같아서 이걸 먹을 심산이다.   

   

그 말을 듣더니 아내가 기겁한다. 언제 적 약인지도 모를뿐더러 약은 그런 식으로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약을 당장에 버리지 않은 것은 아내 모르게 먹을 속셈이다. 설마 그런 약 몇 알 먹었다고 신문에 날 정도로 큰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란 마음이다.   

  

내 그런 욕심이 정상적인 건 아니다. 나도 안다. 

그래도 왜 그런지 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순간,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인간이란 비아냥이 생각났지만 그런데도 그걸 과감하게 거부하지 못하는 게 바로 나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속절없이 늙어간다는 증상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내 어렸을 적에 할머니께서 내게 밥을 먹이다가 내 입에서 흘러나온 밥알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의 입에 주어 넣던 모습이다. 어린 마음에도 약간 거시기한 기분이 들었던 희미한 기억이다. 

지금은 그때하고는 상황이 다르지만, 그 약을 차마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의 결이 내 할머니의 그것과 같은 것이 분명하다. 

또렷하고 강한 의식(意識)은 아니라지만, 도를 넘어버린 절약(節約)이라는 집착(執着)이 대를 이어 궁상스러운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내 눈에도 내가 안쓰럽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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